▲ 김덕권 교도 / 여의도교당
무용지용이라는 말이 있다. 〈장자〉 '인간세'에 나오는 말이다. 세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쓸모가 있어야 한다. 쓸모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는 쓸모가 있음으로 인해 스스로를 망치는 경우도 있다. 반대로 쓸모가 없음으로 인해 자신을 지킬 수도 있다는 것이 무용지용의 뜻이다.

장자는 '쓸모없음의 쓸모', 즉 무용지용을 일관되게 추구한 사람이다. 〈장자〉 첫 장인 '소요유' 마지막 부분에서, 장자는 자신의 죽마고우인 혜시와의 대화를 통해 무용지용 개념을 처음 선보였다. 혜시는 자신의 집에 큰 가죽나무가 있는데 몸체는 뒤틀리고 옹이가 가득해서 먹줄을 튀길 수 없고, 가지는 꼬불꼬불해서 자를 들이댈 수 없어 재목감으로 쓸모없다고 불평을 했다.

이에 장자는 그 나무를 '무하유의 이상향'이나 '넓고 넓은 들판'에 심어 놓고 그 밑에서 한가로이 소요하며 노닐다 드러누워 자는 게 어떠냐고 제안을 한다. 그러면서 그 나무는 도끼에 찍히는 일이 없으니 쓸모없다는 게 어찌 근심거리가 될 수 있느냐고 반문한다.

쓸모 있는 나무들은 그의 유용함으로 말미암아 삶의 고통스러운 참상들을 겪는다. 과일나무인 경우 큰 가지는 꺾이고 작은 가지는 잡아당겨 찢겨짐으로써 타고난 수명을 다하지 못한다. 재목감으로 좋은 나무는 남 먼저 도끼나 톱으로 잘리고 만다. 그래서 못 생긴 가죽나무는 무용지용을 통해 이루어 낸 생존 전략을 넘어 자유롭게 소요할 수 있는 나무로 자란 것이다.

소요는 장자가 그의 책 전편을 통해 한결같이 추구한 인생관이다. 따라서 무용지용을 통해 소요의 단계에 이르는 것은 장자의 간절한 소망이다. 그런 장자에게 어느 날 한 선비가 찾아왔다. 이 선비는 장자를 늘 못마땅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장자의 사상이 크고 높은 줄은 알지만 이상적으로 치우쳐서 그다지 쓸모가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선비가 장자에게 말했다. "선생님의 말씀은 크고 높지만 현실적으로는 쓸모가 없어 보입니다. 마치 저 앞에 있는 나무 같습니다. 저 앞의 나무는 크긴 하지만 온통 구부러지고 울퉁불퉁하여 목수들이 쳐다보지도 않거든요. 재목으로는 별로인 것 같습니다"

이 말을 듣고 장자가 대답했다. "그럼 거꾸로 생각해 보게. 그 볼품없어 보이는 나무가 구부러지고 울퉁불퉁하기 때문에 오히려 목수들한테 잘리지도 않고 그토록 오래 살아 큰 나무가 된 것이 아닌가" "그래도 쓸모가 없는 건 없는 것 아닙니까."

"여보시게. 왜 쓸모가 없나? 햇빛이 쨍쨍한 날 그 나무의 그늘에서 많은 사람들이 시원하게 편히 쉴 수 있지 않나. 비바람과 눈보라가 치면 막아주고, 보잘 것 없는 나무가 산을 보다 푸르게 해준다네. 무척 고마운 존재가 아닌가? 아니 그런가." 그러자 선비는 아무 말도 못하고 물러갔다.

못생긴 나무가 산을 지킨다. 잘 생긴 나무들은 그 잘생김과 쓸모 있음 때문에 베어져 일찍 생을 마감하고 만다. 하지만 못생긴 나무는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기 때문에 천수를 누리게 된다. 이렇게 쓸모없는 것이 오히려 쓸모 있는 것이 된다. 그렇다고 이 나무가 그저 못생긴 이유 하나만으로 산을 지켜낸 것은 아닐 것이다.

모진 겨울의 한파를 이겨내고, 몰아치는 비바람을 견디며, 올곧게 살아온 세월이 있었기에 그런 결과로 이어진 것이다. 또한 무용지용이란 말은 '세상엔 쓸모없는 것은 없다'는 의미도 된다. 쓸모 있음과 쓸모없음의 기준은 오로지 자신에게 있다. 깨어진 독을 버리면 쓸모없는 물건이지만 아름다운 꽃을 심어 놓으면 새로운 용도로 쓰여 질 수 있다.

결국 쓸모라는 것은 상황이 바뀌면 달라지는 것이다. 무용지용 론에는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하는 삶의 궁극적인 목적에 대한 장자의 생각이 담겨 있다. '무엇을 위해서 살 것인가.'

하나는 권력, 지위, 돈 등 자기 바깥에 있는 외물을 추구하고 성취하는 데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두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에 내재해 있는 '참된 자기'를 깨닫고 실현하는 데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두는 것이다. 남에게 보이는 나도 중요하지만 스스로에게 부끄러움 없는 '나'도 참으로 중요한 것이 아닐까.

나는 평소에 잘났다고 생각해 본 적이 별로 없다. 언제나 못나고 가진 것도 많지 않고 배움도 약하다. 머리가 멍청해 바보가 따로 없다. 그래서 나는 아예 '외물'을 추구하기 보다는 '참된 자기'를 깨닫고 실현하는 데 삶의 궁극적인 목적을 두며 살아왔다. 그래서 언제나 나는 바보 같이 산다. 항상 밑지며 사는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진 것을 몽땅 베푸는데 전력을 다한다. 꼭 재물이 있어야 베푸는 것은 아니다. 재물이 없으면 몸으로 때우고, 몸도 성치 못하면 마음으로라도 잘 되라고 빌어준다. 또한 바보 같이 세상을 위해 죽기 살기로 맨발로 뛰며 헌신하고 봉사하려고 노력을 한다.

그런데 이 세 가지 바보처럼 살아가더라도 상을 가지고 살면 안 된다. 무주상 보시를 해야 한다. 반대로 유주상이란 내가 누구에게 보시를 하거나, 불사를 하더라도 '내가 이러한 보시를 했다, 이러한 희사를 했다, 이러한 시주를 했다'고 스스로 자랑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남에게 자랑을 하고 뽐내고 으스대고 하는 것이 유주상 보시다.

잘생긴 나무가 먼저 베인다. 내가 뭘 좀 했다고 자랑하면 유루복을 받는다. 범부는 작은 선에 걸리어 큰 선을 행하지 못한다. 그리고 작은 지혜에 걸리어 큰 지혜를 얻지 못한다. 그러나 대인은 작은 선으로부터 큰 선을 행하고 작 게 아는 것으로부터 크게 아는 것을 얻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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