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서 저술로 읽는 교사〉

원기33년(1948) 남원교당의 봉불은 원불교 교명선포의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해방공간 끝자락에 일제강점기에 신사(神社)가 자리했던 금암봉터에 교당을 신축하고, 봉불을 기념해 '한시창화(漢詩唱和)모임'이 이뤄졌다.

교단에 단 한 차례 열린 이 모임에서 읊어졌던 시문이 이공주(九陀圓 李共珠, 1896-1991)종사의 유필문건에 〈수첩〉으로 들어 있었으니, 〈선진한시록(先進漢詩錄)〉이다.

제목도 붙이지 않은 이 〈수첩〉은 표지에 '33. 8. 25'이라고 적혀있다. 이것은 한시 모임이 이루어진 당시 날짜 원기33년 8월25일을 가리킨다. 그해 4월27일 교명이 선포되고, 7월17일 대한민국 헌법이 제정됨으로써 이른바 해방공간 3년을 마감하는 기간이다.

이 〈수첩〉에 교단 선진들의 남원교당 대각전 낙성을 기념하여 지은 한시 21수가 수록되어 있어, 편의상 〈선진한시록〉이라 이름지어 부른다. 이는 가로 11cm×세로 9cm의 한지 10쪽으로, 이공주 종사가 연필로 채록했다.

21수의 한시는 7언율시로 다섯 운(韻)은 성(城)·명(名)·청(淸)·명(明)·생(生)이다. 기·승·전·결을 각각 7언 2구로 구성하고 있는데, 이들 운자를 첫 구인 '기'에 2자, 그 밖에 각각 한자씩을 배당하는 격식을 살리고 있다.

한시를 남긴 선진은 송벽조(久山宋碧照, 1876-1951)·유허일(柳山柳虛一, 1882-1958)·이완철(應山李完喆, 1897-1965)·송혜환(公山宋慧煥, 1905-1956)·오창건(四山吳昌建, 1887-1953)·이귀생(松山李貴生, 1883-1955)·이군일(湖山李君一, 1895-1959)·조원선(回山曺元善, 1896-1950)·정일지(忠山丁一持, 1892-1970)·김정진(鳳山金精進, 1885-1957)·송창허(晉山宋蒼虛, 1896-1961)·이운권(高山李雲捲, 1914-1990)·박장식(常山朴將植, 1911-2011)·서병재(普光徐炳宰, 1904-1969)·조송광(慶山曺頌廣, 1876-1957)·이형기(方山李亨基, 1887-1968)·이중화(朗山李中和, 1903-1989)·송일환(明山宋日煥, 1896-1971)·김창준(純山金昌俊, 1911-1957)선진 등 19인이며, 2수는 무명씨 작이다.

당시 남원교당은 양도신(薰陀圓 梁道信, 1918-2005)종사가 교무로 재직 중이었다. 아직 봉불식 제도가 갖춰지기 전, 2주간의 교리강습을 실시하던 중이었다.

'웅진의 남원 한 성을 차지했는데/ 원래의 빼어난 땅 헛된 이름 아니더라/ 금암봉 높이 솟아 옛 인연 지중하고/ 원불교 법당 이뤄지니 대기가 맑구나. 수면에 바람 없으니 파도는 절로 쉬고/ 천심에 달 밝으니 그림자마다 밝구나/ 어떻게 천억의 화신이 되어/ 도처의 인간인 저 중생을 건지리라'(오창건)고 읊은 싯귀에는 교단의 양양한 미래가 담겨 있다.

1876년 생부터 1911년 생까지인데 모두 대종사의 친견제자들이며, 구인선진부터 재가교도까지 포함되어 있다. 예컨대 〈대종경〉에 채록된 조원선 선진은 조영진·효경·대성 교무의 조부인데, 한문사숙을 경영했다는 사실 외에는 후대에 전해 내려오는 글이 없다.

그런데 이에 작품이 나타나니 큰 수확이 아닌가? 교단의 역사에서는 물론 '원불교 문학'과 관련해서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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