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은 답을 알고 있다>라는 책을 흥미롭게 읽은 적이 있다. 그 무정한 물(무정물)이 사람의 언어 따라 각기 다르게 반응하는 이미지들을 본 후론 모든 물이 달리 보였다.

어떤이는 밥을 가지고도 어떤 경우엔 검은 곰팡이가 슬었고, 어떤 말에는 하얗게 발효가 됐다는 실험 결과들을 연이어 보여주기도 했다. 무정물이라고 여기는 물이나 밥 같은 것들 조차도 사실은 다 보고 다 알고 있어서 말에 따라 다르게 반응하는 영험한 존재임을 보여준 실험이었다.

어디 물이나 밥뿐이랴. 그보다 더한 바위나 무쇠나 책상이나 우주안의 모든 것은 다 보고 다 알고 있음을 대종사는 변의품 1장에서 땅의 영험함을 예로 들어 보여주셨다. 천지는 식(識)이 있다! 온 천지만물이 다 보고 다 알고 있으니 생생히 느끼고 응대하라는 일깨움이다. 일체만물이 다 식이 있어 우리가 하는 일체를 다 보고 다 안다는 말씀이다.

요즘 의문 하나가 해결되지 않은 채로 남아있다. 사람이 살지 않는 집은 빠른 속도로 폐허가 진행되는데, 거주하면 허름한 집도 몇백년을 간다는 사실이다. 기둥만 한번 만져줘도 오래간다 하니 사람이 가진 기가 얼마나 불가사의한가 싶을 뿐, 정확한 원인은 모른다. 집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들도 다 알고 보고 있다는 것은 명확한 사실이다.

우주안 모든 존재, 허공도 다 보고 다 알고 있으니, 무정물이라고 무엇 하나인들 함부로 대할 수 있을까. 최령한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랴. 어린 자녀 앞에서 부모가 하는 모든 언행들을 신생아들도 다 보고 듣고 알고 말하고 있다. 때문에 우주만물 어느것을 대하더라도 부처님을 대하는 마음으로 경외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주만물은 그들만의 방식으로 자기를 표현하는 언어를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다만 인간의 언어체계와는 달라서 귀로 듣지 못할 뿐이다. 물도 밥도 사람이 마음으로 보낸 언어를 다 알아듣고 변화를 달리 일으키지 않던가. 마음의 언어는 일체만물과 의사소통을 가능하게 한다.

화분을 잘 가꾸지 못하는 나는 물을 제때 주지 못해 죽게 만드는 일이 잦다. 다른 집 화초들이 싱그럽게 커가는 것을 보면서 갑자기 우리 화초들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간 귀찮은 일거리라 여기고 어쩌다 마지못해 물을 주곤 했으니, 목마르다고, 관심 가져달라고 소리없는 아우성을 얼마나 했을꼬.

고마워! 미안해! 수고했어! 이런 식으로 다 보고 다 아는 일체만물과 마음과 기운으로 대화하며 살아보면 알게 된다. 동물도 식물도 물건이며 공간도 한 기운으로 연하여 살랑살랑 우쭐거리며 좋아하는 것을. 이럴 때는, 내가 하루종일 움직이는 모든 육근작용은 귀찮거나 해야만 하는 일거리가 아니라, 천지만물에 대한 신앙이며 불공이 된다. 이때 수행은 저절로 함께 있다.

따로이 신앙처를 찾고 수행할 시간이 없다며 넋두리 하는 것은 얻고자하는 것들과 완벽히 등진 삶이며 불행이며 고통이다.

허공과 일체 무정물과 일체 식물과 일체 동물과 일체 인류를 영험한 식을 가진 부처로 대하며 소통하고 산다면 처처불상 사사불공이 편만한 낙원세상이 어디 다른 곳에 있으랴.

/송도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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