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년, 장구히 이어온 해외교화의 효시

▲ 오사카교당은 大阪市 生野區 勝山北 1丁目 11-11에 새로운 터전을 마련해 활발한 교화활동을 기대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낯선 이국땅에서 극도의 시련을 이겨내며 나라 잃은 설움을 삼켜야 했던 재일동포들에게 희망의 못자리판을 일궈낸 일본교구 오사카교당.

83년을 이어온 해외교화의 효시 오사카교당이 숱한 좌절과 시련으로 점철된 일본교화의 수고로움을 이겨내고, 4일 이안봉불식을 열었다. 국내외 200여 명의 재가출가 교도들이 참석한 가운데 벅찬 감동과 결의로 현지인 교화의 새로운 이정표를 썼다.

민족의 자존심 지켜낸 재일동포의 도시

일본 제2의 도시인 오사카(大阪)는 면적 223㎢, 24구(區)에 인구 248만 명이 거주하는 경제와 문화를 대표하는 산업도시다. 63만 재일동포의 25%인 15만 명이 이곳에 살고 있으며, 교당이 위치한 생야구(生野區) 구민 4명 중 1인이 재일동포다. 1세대들은 일본사회의 가혹한 차별에도 민족성과 자존심을 지켜왔지만 2, 3세대로 넘어가면서 차츰 일본에 동화됐고, 역사의식 또한 희박해져 매년 1천여 명의 전후 귀화자 및 일본인과 결혼 비율도 높아지고 있다.

원기16년(1931) 불법연구회 2대회장 조송광 선진은 장남 수환이 오사카 고우큐(剛球)제조회사에서 직장생활을 하고 있어 가족들을 데리고 이주, 그의 본업인 한의원을 경영하며 인술을 베푸니 약방이 성시를 이룸에 따라 20여 명의 정식회원이 모집됐고, 원기19년 대판지부(大阪支部)를 창립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원기20년 박대완 초대 교무가 파견, 西成區와 東淀川區로 나눠 예회를 봤으나 일본경찰은 박 교무의 독립운동 전력을 꼬투리 삼아 집요한 감시와 내사를 벌인 끝에 1년 만에 일본교화를 마감하고 본국으로 추방됐다. 이후 원기67년 교화를 재개한 장봉운 교무는 교단의 지원으로 원기75년 봉불식과 원기82년 종교법인을 인가받았고, 원기84년에 부임한 김법조 교무는 현재까지 18년째 교화에 전력하고 있다.

▲ 오사카교당 교도들이 이안봉불식을 진행해 일본 현지인 교화와 문화 교화에 대한 희망과 결의를 다졌다.

이안 봉불, 현지인 교화 희망길 열어

구 교당은 대지 43m²의 3층 건물로 20명을 겨우 수용할 정도의 매우 협소한 공간이었다. 특히 외부 민원이 잦고 법회 및 공양, 대외행사의 다양한 교화를 시도하는데 어려움이 많아 교당 이전은 피할 수 없는 중대과제였다.

원기91년 8월21일부터 시작한 천일기도와 동전모으기, 김성인 교도의 1억원 희사표명은 막연했던 꿈을 현실화시켰다. 여기에 원기100년 6월, 일본 순방 중이던 좌산상사의 격려에 힘입어 대책위가 구성되면서 활력을 불어넣게 됐다. 그해 12월17일 현재의 大阪市 生野區 勝山北 1丁目 11-11에 소재한 대지 261m², 연건평 165m² 2층 건물을 매입했고, 내부수리 및 기본시설 경비까지 한화 6억1천 만원을 들여 등기이전을 마치니, 도저히 해낼 수 없을 것 같았던 현실에 교도들은 "백지혈인의 이적이 이것이 아니겠냐"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재일동포 2세인 김성근 교도회장은 "처음 동전모으기로 종잣돈을 만들 때만 해도 교당 이전은 너무나 멀게만 느껴졌는데, 교당의 주인은 교도 스스로 되어야 한다는 김 교무님의 말씀에 용기를 냈다"며 "그동안 한글 2번, 일본어 2번의 교전사경을 완수하면서 대종사님의 법을 이해하게 됐고, 일원상을 내 안에 모시는 것이 참다운 봉불임을 깨닫게 됐다. 이제 오사카 전 교도들의 마음은 하나이다"고 희망의 의지가 대단함을 전했다.

올해 7월1일, 종교법인 규칙변경 등기를 마친 김 교무는 "좌산상사님과 경산종법사님을 비롯한 재가출가 교도들의 크신 후원으로 거룩한 법도량을 마련하게 됐다"며 "한점 한점 정성을 들인 것이 어느새 굵은 선으로 이어져 있었다"고 고단함 마저 잊게 해준 교도들의 합력에 감사를 표했다.

일원상 진리 실천하는 활불도량 서원

박명음 교도의 사회와 현지인인 원성 교도의 통역으로 진행된 봉불식에서 한은숙 교정원장은 "오사카교당의 법맥을 장봉운 교무님이 살려냈고, 그 뒤를 이어 18년간 청춘과 서원을 불사른 김법조 교무의 헌신이 있었기에 오늘의 역사가 이뤄졌다"며 "10년의 정진기도와 혈성교화는 공들이고 인내하고 공부하는 창립정신의 표본이며, 이러한 정성에 감응하여 수많은 호법동지들의 마음을 합하게 했다"고 일원상 진리를 실천하는 활불도량으로써, 정신개벽의 요람으로써 커나갈 것을 심축했다.

차광신 일본교구장은 "오사카교당은 성스럽고 경이로운 성소이다. 이곳에서 교조정신과 교법정신이 거듭나 일본교화의 새 전기를 만들어가자"고 소명의식을 재차 확인했다.

이날 종법사상은 오사카교당 김성인 교도가, 교정원장상에는 강남교당 최한정 교도가 수상했으며, 감사패는 전명진·김순명교무, 화정교당 박신영 교도, 신제주교당 김미희 교도가 받았다. 이어진 종법사 치사는 백현린 국제부장이, 축사는 정성만 제주교구장, 그리고 원기81년 동기생들의 축가로 봉불식 분위기가 한층 고조됐다.

김성인 교도는 "죽을 것 같이 어려웠던 순간, 교무님의 기도와 문답으로 괴로움을 해결할 수 있었다"며 "지난 5년 동안 아끼고 아낀 금액이 1억원에 가깝게 됐고, 희사하기로 약속한 그 마음이 신심이 됐다"고 신성의 결정체가 봉불임을 설명했다.

▲ 김법조 교무는 18년간 오사카교당 교화를 위해 전력을 다한 결과, 4일 이안봉불로 큰 결실을 맺었다.

한국문화 알리는 주체, 위상 더 확고해져

오사카교당은 주 3회 법회에 재일동포 4인, 현지인 3인, 회사원 3인, 유학생 1인, 한국인 11인, 미입교자지만 미래 교도 5인, 어린이 법회 5인 등 다양한 교도들로 구성됐다. 평균 15명의 출석이 유지되고 있으며, 10여명의 교도들이 주인임을 자청하고 있다.

김 교무는 "장봉운 교무님의 헌신적 노력이 교화의 저력이 됐다"며 "잘하는 게 없어서 끝까지 하는 게 잘하는 것이라 믿고, 시간을 재지 않고, 수를 세지 않고, 할 때까지 하면 되리라는 믿음으로 임해 왔다"고 일본교화의 고충을 짐작케 했다.

그동안 오사카교당은 교화저변 확대를 위해 인근 조선중학교 민속놀이지도, 한국다도, 명절문화축제, 한복입기, 돌잔치, 전통결혼식 등 지속적인 문화행사를 진행해 왔으며, 독거노인돕기, 노인복지시설 문화알림, 일본어학교, 유학생 지원 등 사회보은사업을 전개해 왔다. 물론 직접교화로까지 연결은 어렵지만, 재일동포사회와 지역사회에 한국문화를 알리는 주체로서 확고히 자리를 잡았다는 평가다.

▲ 재일동포 1세 김성근 교도회장은 일본어와 한국어 법문사경으로 교법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특히 오사카교당은 문화와 인정교화를 중시한다. '문화'라는 매개체를 통해서 역사적 아픔과 갈등, 이념과 국적을 초월해 순수하게 만날 수 있고, 이러한 만남이 상생의 선연으로 이어지고, 나아가 법연이 되는 '될 때까지'의 정성교화가 그것이다. 2001년부터 2008년까지 10회 추진한 한방무료진료(원광대학교 한의학전문대학원 후원, 조남근 교수 외 의료진)와 코리아타운 독거노인들의 지원 및 공양 등은 꾸준한 인정교화로 불연을 두텁게 했다.

동포들은 해마다 자신들을 잊지 않고 정성스럽게 진료하는 의료진들로부터 고국의 따뜻한 정과 위로를 받았고, 발전하는 한국에 대한 자신감을 갖게 했다. 또한 2006년부터 매년 3, 4차례 독거노인 10~30명을 대상으로 한 방문지원도 동포사회에 무언의 지지를 얻게 된 배경이다.

이제 오사카교당은 신심·공심·공부심 진작으로 교당의 주인 만들기에 주력하고 있다. 기존의 문화교화를 확대해감으로써 결실을 거두려 한다.

중장기적으로는 초고령화 시대를 맞아 교당시설을 적극 활용한 고령자 대상 서비스 봉사, 복지시설 대상 문화알림, 유학생 숙소 및 문화원 운영 등으로 한국문화를 알리는 주체로서 그 위상을 공고히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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