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광덕 교무 / 통영교당
교당은 대종사의 깨침을 전달하는 현장으로 가장 중요한 곳임에 틀림이 없으나 구체적인 연구가 부족했고 교당 운영의 대부분을 개교당에 맡기는 경향이 있었다. 교당을 신설하거나 이설 할 때에도 지역적 안배를 검토하지 않고 또한 교당의 규모에 있어서도 효율적인 전달방법을 고려하지 않고 건축비에 맞춰 법당과 생활관을 신축했다. 대부분의 교당이 사무실, 상담실, 단회실, 교육실, 식당, 선실, 유아실, 의식실, 영모실, 휴게공간, 운동시설 등 부대시설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없이 교당을 신축하고 있다.

2세기를 맞으면서 새 시대의 새 법으로 교화할 원불교는 어떤 형태를 지향해야 할 것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대종사께서 의도하신 낙원 세계를 만들어 가려면 어떤 것이 합리적이고 효율적인지 검토해 볼일이다. 대종사께서는 '과거에 모든 교주(敎主)가 때를 따라 나오시어 인생의 행할 바를 가르쳐 왔으나 그 교화의 주체는 시대와 지역을 따라 서로 달랐다'라고 말씀하고 이 시대(글로벌 시대)에 맞는 사통오달된 방법으로 교화 하고자 했다.

학교 교육을 보면 반별 학생 수가 점차 줄어드는 것을 볼 수 있다. 선생 1인당 학생 수가 적어야 교육 효과가 있다고 해 그 숫자를 줄이는 것으로 알고 있다. 만일 우리가 학교 교육처럼 간다면 한 교당의 교도수는 얼마정도 되는 것이 적정한가. 우리가 시위의 현장을 모델로 한다면 한곳에 많은 숫자를 모아 놓고 감동적인 연설을 해야 한다. 또한 규모의 경영을 근거로 대형 교당이 교화에 효과적이라고 말하면서 교당통합이 최우선 과제인 것처럼 이야기 하는 견해도 있다. 우리는 어떤 모델의 교화를 지향해야 할 것인가! 우리의 방향이 무엇인가에 따라 교당을 신축하여야 할 것이며 지역적 안배도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우리 법당의 모델은 무엇인가? 의자를 놓을 것인가 마루를 놓을 것인가, 크기는 소그룹으로 여러 개를 만들어야 하나 아니면 대규모 법당을 만들어야 하나? 또 교당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 교무님의 설교를 중심으로 하는 법회인가, 선과 요가를 중심으로 하는 선방인가, 교화단 법회를 중심으로 할 것인가, 의식 중심으로 가야 하는가, 아니면 모두를 종합해야 하는가! 앞으로 오는 시대는 무엇이 필요하고 그 필요한 것을 효율적으로 전달하는 시스템은 무엇일까!

교의품 30장에서 '모든 법의 주인이 되는 용심법(用心法)을 부지런히 배워서 천만 경계에 항상 자리이타로 모든 것을 선용(善用)하는 마음의 조종사가 되며, 따라서 그 조종 방법을 여러 사람에게 교화하여 물심양면으로 한 가지 참 문명 세계를 건설하는 데에 노력할지어다'라고 하셨듯이 교당에서 꼭 하여야 할 일은 용심법을 가르치는 일이며 생활 속에서 그 법을 적용해 보고 교당에 돌아와서 문답하고 공유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 점에서 대종사는 교화단을 제시했고 문답감정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따라서 출가교역자 1인당 100여 명정도의 인원을 관리하는 것이 이상적이라고 생각한다. 출가교역자가 총 단장이 되고 10명의 단장단을 이끌며 매주 모여 문답 감정을 하자는 것이다. 10인이 1단이므로 100여 명이면 상단을 구성할 수 있으며 상단의 단장을 출가가 맡자는 것이다.

대형교회나 규모가 큰 교당이 다양한 취미동아리를 운영하고, 여러 가지 행사 하는 것을 부러워하면서 그것이 교화가 잘 된 것처럼 회자되기도 하나 그것은 부가적인 것이며 사회에서도 얼마든지 할 수 있고, 우리는 교법의 실천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 그리하여 동리 동리에 교당을 세우고 교당에 자주 출입하면서 문답을 해야 하며 그렇게 될 때 대종사 정신으로 광대 무량한 낙원 세계가 가까워지리라 생각한다.

교단에서 교당의 규모나 역할 영역 등을 관리하지 않음에 따라 교당끼리 너무 인접해 있는 경우가 있고 어떤 곳은 교당이 없어 교당에 가려면 여러 시간이 걸리는 곳도 있다. 또한 교도의 자유의사에 따라 교당을 결정하다보니까 가까운 인근에 교당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멀리 있는 교당에 출석을 하고 있다. 따라서 교당까지 오가는데 거리에서 소모하는 시간이 길어지므로 교당을 찾는 횟수가 줄어들고 주변의 인연을 교당으로 안내하는데 어려움이 많다. 이것이 교화부진의 이유 가운데 하나라고 생각한다.

교당별 책임구역을 정하고 지역 내에 있는 교도는 그 교당에 다니도록 하며 교당의 규모나 교도숫자를 고려하여 교당 불리기를 하는 것이 교화단법 교화가 아닐까. 전국을 거미줄처럼 구분해 광역자치단체는 항단이 맡고 기초자치단체는 저단이 맡으며 100명 단위로 교당을 만들어 운영하는 것은 어떨까. 저단을 중심으로 교화계획을 세우고 서로 문답하면서 교화를 한다면 물셀 틈 없는 교화가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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