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시현 교도 / 한국외국어대 명예교수 원남교당
'총체적 난국'이라는 표현이 자꾸만 떠오르는 요즈음 우리는 '평화'를 외치고 있다. 그 만큼 평화가 절실한 시국인 것이다.

우리는 100년 전 대종사께서 설해주신 '최초법어'를 알고 있다. 수신의 요법으로 고난의 책임을 다른 데에 돌리지 않고 스스로의 참 모습을 찾고 반성하며 스스로 제도하는 길을 배우고, 제가의 요법으로 개인이 진급하는 길, 행복한 가정을 이루는 길, 국가의 안녕 질서를 유지하는 길을 배우며, 강자ㆍ약자 진화상 요법으로 승자와 패자가 따로 없이 모두 함께 영원한 평화를 얻을 수 있음을 배우고, 지도인으로서 준비할 요법으로 전문성을 갖추고 존경과 신뢰를 받는 지도자가 되는 길을 배운다.

최초법어는 원불교 중심교리의 원형이라 할 수 있는 만큼 100년을 이어오면서 이 법을 배우고 이 법 따라 수행해온 원불교인의 입장에서 현 시국을 두고 과연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일단 책임을 통감하지 않을수 없다. 대종사를 모시고 산 우리의 선진들은 이소성대 정신, 무아봉공의 정신을 체질화했고 일심합력으로 오로지 교법을 실천하는 데에 온 정성을 다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출가·재가 차별의식이 생기고 마치 성과 속을 구분하기라도 하는듯한 분위기가 조성되기도 하고, 법위 사정에서 공부 성적보다는 사업 성적이 더 중요하게 작용하지 않나 하는 오해(?)를 불러일으키기도 하는 등 일련의 정황을 파악하게 되면서 원불교다움이 퇴색되어간다는 두려운 생각을 하게 된다. 교단의 지도층이 공중사를 처리하는 방식이나 사용하는 언어가 계문을 어기는 수준이라고 판단하게 하는 일이 발생함으로써 창립정신 실종을 우려하기에까지 이르렀다.

본래의 원불교정신을 찾아야 한다. 교법을 바르게 실천해 사회를 맑고 밝고 훈훈하게 하는 일에 앞장서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리가 달라져야 한다. 정신 차려야 한다.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표어를 외치기만 하고 실천에 앞장서는 데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지도할 자리에서 잘 가르치는 사람이 되기 위해 지도인으로서 갖춰야 할 바를 갖추어야 하고, 배워야 할 자리에서는 또한 강자 약자 진화상 요법을 기억하며 잘 배울 줄 알아야 한다. 강자와 약자가 대결의식으로 서로를 대해서는 강자도 약자도 진화할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 실천을 달리할 수는 없는 일이다. 강자는 약자를 보호하고 약자는 강자에게 배워서 지도력을 키워야 한다. 자리이타의 도, 상생의 도가 바로 이런 것이다. 소태산의 훈련법은 자리이타의 도, 상생의 윤리를 지키며 무아봉공을 실천하게 하는 법이다. 상사님, 종법사님 또는 종사님께서 설법을 해주시는 행사의 명칭을 상사님 훈증 훈련, 종법사님 훈증 훈련, 종사님 훈증 훈련이라고 하는 등의 각종 '훈증 훈련'이라는 표현을 자주 접하는데, 과연 소태산의 훈련법에 맞는 것인지 의문스럽다.

교단은 조직을 키우고 대형 건물을 짓고 장엄화하는 데에 주력할 것이 아니라, 권위주의나 형식주의를 벗어나 지자를 본위로 해 세상을 바르게 하고 생령을 이롭게 하는 일에 정성을 쏟아야 한다. 원불교 특징을 보이는 건축물, 후대에 길이 남는 건축물을 짓는 것도 중요할 수 있으나 그 보다 더 급하고 중요한 것은 진짜 원불교 정신을 다시 살려내는 일이다. 사업보다는 공부에 더 정성을 쏟아야 한다. 우리가 할 일은 각자 맡은바 일에 근실해 생활의 자유를 얻는 한편 사회에 의무와 책임을 다하고, 재가와 출가, 남녀, 직종, 직위에 근본적으로 차별을 둘 것이 아니라 오직 구하는 사람의 목적을 달하게 하며, 자타의 국한을 벗어나 두루 교육시키고 세상의 문명을 촉진시켜서 평등세계, 평화의 세계를 구현하는 것이다.

소태산의 교리가 좋다고 외치기는 하면서 어찌해 교리 실천을 제대로 하는 데에는 소극적인것인지? 참으로 안타깝다.

요컨대 우리 사회든 교단이든 총체적 난국에 처해 있다는 느낌이 드는 것은 병이 들었다는 것이니 우리는 법문 '병든 사회와 그 치료법'을 다시 공부해 치료에 힘써야 할 것이다. '의사가 환자를 치료하는 의술'과 같은 '공부의 요도 삼학팔조'와 '환자를 치료하는 약재'와 같은 '인생의 요도 사은사요'를 실천해야 한다.

"세상 사람들의 큰 병은 아는 데에만 힘쓰고 실행이 없음이다"라고 하셨다. 〈소학〉을 세 번 읽은 며느리가 시아버지 상투를 잡는다는 말은 아는 것이 많아도 실천이 따르지 않으면 소용이 없다는 것. 우리에게는 수행이 필요하다. 높은 법위에 올라 근사한 법을 설한들 몸소 실천하지 않으면 교화사업의 성공은 멀어질 수밖에 없다. 지도자가 지행일치를 보여주지 못할 때 신뢰는 무너지고 신뢰를 확보하지 못한 지도자는 지도자로서의 역할을 제대로 할 수가 없다. 더구나 교화대상자를 내려다 볼 때는 진정한 감화를 줄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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