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과 땅 중에 어느 것이 정하고 어느 것이 동하냐고? 대체 이것이 질문자의 삶에 무슨 상관이 있었을까. 예나 지금이나 모든 성리, 성자들의 말씀은 깨침을 인도하는 것이거나, 깨친 후 삶의 변화를 위한 것들이다. 일체의 성리는 온통 삶 자체인 것이다. 자기의 삶과 동떨어져 머리로 하는 성리는 말짱 허사다.

도대체 하늘이 정한들 동한들, 땅이 또 그러한들 네 삶과 무슨 상관이 있느냐를 되묻고 싶었을 대종사. 하늘과 땅은 둘이 아니므로 떼어서 동하고 정함을 말할 수 없다고 했다.

천지는 우주만물 일체를 표현하는 방식이지 '하늘 그리고 땅'이 아니다. 천지라는 말을 하늘과 땅, 이분법으로 해석하니 오류가 생겼을 법하다. 우주만물이 천지이다. 나누는 것 자체가 모순이다. 사람도 천지, 우주만물인데, 우주만물을 어디서부터 어떻게 나눌 것인가.

온 천지(하늘땅)는 한 기운 한 몸이다. 온몸, 즉 법신이다. 자기가 곧 천지(하늘땅)이거늘, 어디가 정하고 어디가 동하냐고 묻고 있다. 법신으로서의 내가 곧 하늘이며 땅이지. 천지(하늘땅)가 곧 나다. 온 천지가 공적영지심, 지금 보고 듣는자, 그 밝음 하나로 운행된다. 천지가 곧 나며, 내가 곧 천지이니, 천지여아 동일체다. 설령 나눠서 동하고 정한 곳을 구분한들 그걸 어디다 쓰려고 그랬을까.

굳이 동정을 나누자면 이렇다. 온 천지는, 동하는 측면으로, 무상으로, 변하는 면에서 보자면, 성주괴공과 생로병사와 심신작용 따라 온갖 조화를 부린다. 정하는 측면으로, 유상으로, 변함이 없는 면에서 보면, 상주불멸하며 여여자연한 이 밝음, 천지의 식(識), 본성, 자성, 공적영지심이 온 천지(하늘땅)에 편만해 있다. 유상이든 무상이든, 동이든 정이든, 한몸으로 도는 것이지 나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찰라도 터럭 끝만큼도 나뉘어지는 때는 없다.

어디서 들은 것, 본 것, 지식을 가지고는 본질에 도달할 수 없다. 만고 불변의 이 원리, 성품을 먼저 꿰뚫은 연후에 중생제도를 위해서, 그 자리를 알기 쉽게 설명해 주기 위해서 온갖 학설을 참고로 가져다 쓰라 했다. 그것이 순서에 맞다. 말에 속고 학설들에 붙들려 지식창고만 채우느라 머리는 무겁고 논쟁만 일삼는 허송세월 하기 쉽다. 학설수집가, 글자놀음, 지식의 노예가 되어 그것들을 수집, 분석해서 본질에 도달하려는 것은 기와를 갈아 거울을 만드는 바보짓이다.

원리를 꿰뚫으라, 본질을 직관하라는 대종사의 천둥소리 같은 당부와 호통이 들렸어야 하는데… 오죽 불행한 일이 그 만나기 희귀한 주세성자를 앞에 두고도 훤한 자리를 터럭 끝만큼도 보지 못한 채 학설이나 붙잡는 것이다.

달을 가리키면 달 자체를, 성품 자체를 꿰뚫어야 하는데, 손가락만 뚫어져라 보고 있다. 누구의 손가락(학설)이 더 그럴싸한지, 더 길거나 더 쓸만한지를 비교하며 평생 이 손가락에서 저 손가락으로 손가락 갈아타기 하거나, 손가락 수집가로 사는 일이 참 많지 싶다.

대종사님 말씀으로 손가락만 하나 더 보태지는 않을지도 걱정이다. 그것 분석하고 학설 논하느라 아침이슬 같은 무상한 세월 다 간다. 그러는 정성이면 이미 달에 도달하고도 남았을터!

/송도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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