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남 담양에 살고 있는 곽예남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는 92세로 현재 폐암 말기 환자다. 60년 만에 중국에서 귀향한 곽 할머니를 외조카가 모시고 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곽예남 할머니, 타국살이 60년
아픔 잊기 위해 일에 매진해온 세월, 사람 정 그리워

일제강점기, 힘없는 나라 백성으로 태어나 꽃다운 나이에 온갖 고초를 겪어야 했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들. 일본의 진정어린 사과를 받아내겠다는 희망 하나로 가슴에 한 맺힌 사연을 삭이고 삭혀 왔지만 한국 정부는 이마저 짓밟아버렸다.

지난해 12월28일 한일 외교장관회담에서 한국 외교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 당사자가 아닌 일본측 입장에 손을 들어줬다. 이날 합의한 한·일위안부협상은 이후 일본의 진정어린 사과 대신 10억엔 출연금으로 '화해와 치유 재단' 설립에 힘을 실었고, 더 이상 위안부 문제를 거론하지 못하게 빌미를 제공했다. 이에 국내외를 막론하고 시민들은 평화의 소녀상을 건립해 불합리한 한·일 협정에 부당함을 표하고 있다.

현재 정부에 등록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는 238명, 생존자는 42명이다. 더욱 안타까운 건 이들의 평균연령이 89.4세의 고령이란 사실이다. 지난 5월17일에는 전남 해남에 살고 있던 공정엽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96세)가 노환으로 별세했다. 이로써 광주전남 지역에는 유일하게 담양군 대덕면에 살고 있는 곽예남 위안부 피해자 할머니(92세·이하 할머니)가 생존해 있는 셈이다. 하지만 곽 할머니는 현재 폐암 말기로 시한부 인생을 살고 있다. 지난 2일 '광주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 정동석 사무국장(광주교당)과 함께 곽 할머니를 만났다.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더니

곽 할머니를 만나러 간 날은 가슴 한편에 미안함이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괜스레 시린 상처를 들추는 것은 아닌지 염려도 됐다. 하지만 기우였다. 방에 들어서자마자 인기척을 느낀 곽 할머니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반갑게 맞아주었다. 곁에 앉으라며 이불을 걷어내며 자리까지 내주던 곽 할머니는 한국어를 거의 하지 못했다. 그 안타까움은 시간을 거슬러 오래 전, 할머니가 일본군에 끌려갔던 그 시절로 데려갔다.

곽 할머니는 전남 담양군 대덕면 장산리 안양골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 추억을 거의 잃어버린 할머니는 고향 '안양골'만은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2남4녀 중 셋째로 태어나 언니, 오빠를 잘 따랐다. 14살 되던 어느 날, 텃밭에서 나물을 캐던 소녀를 일본군이 "공장에 취직시켜 주겠다"며 데리고 간 것이 부모와의 영영 이별이 됐다. 만주로 끌려간 곽 할머니는 낯선 타국에서 일본군에 의해 삶을 송두리째 짓밟히고 말았다. 해방 후에도 할머니는 고국으로 돌아올 수 없었다.

곽 할머니는 국적도 없이 타국에서 60년 세월을 살았다. 2004년 모방송사에서 '60년 만의 귀향'이란 주제로 중국 안휘성 숙주에 살고 있는 할머니를 찾아낸 것은 그나마 운이 좋았다. 방송 덕분에 팔순의 나이에 그토록 그리던 고향 땅에 발을 내딛게 됐지만 부모와 오빠는 이미 이생의 인연이 아니었다.

그리움과 안타까움에서인지 폐암 말기와 치매를 앓고 있는 곽 할머니는 가끔씩 "내가 돈 벌면 제일 먼저 부모님에게 용돈 드리고 다음은 오빠 그리고 간병인에게 주고 싶다"고 입버릇처럼 말한다. 곁에서 상주하며 할머니를 돌보고 있는 외종조카 이관로(59)씨는 마음이 조금 섭섭하다. 그도 그럴 것이 지난해 12월 폐암 말기 6개월 시한부 판정을 받은 곽 할머니를 위해 직장도 놓고 가족과도 헤어진 채 오직 어머니(곽 할머니의 막내동생)의 뜻에 따라 이모를 모시고 살고 있는 그다.

▲ 외종조카 이관로 씨가 곽예남 할머니를 모시기 위해 비닐하우스 속에 컨테이너집을 지어 함께 살고 있다.

그리움은 다시 반가움으로

그는 "어머니가 평소에도 이모를 많이 그리워했다. 꼭 찾고 싶다고 여러 번 말을 했고, 방송사에서 만주로 끌려갔다는 것 외에는 확인된 것이 하나도 없을 때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정보를 꿰맞춰 가족을 만나게 한 것도 어머니의 도움이었다"고 밝혔다.

하지만 그토록 찾고 싶었던 언니를 60년 만에 다시 만난 이씨의 어머니 곽남숙 씨는 원을 이루고 먼저 세상을 떠났다. 그 뒤를 이어 이씨가 곽 할머니를 보살피고 있는 중이다. 병원에서 폐암 말기 판정을 내리고 더 이상의 수술은 못한다고 했을 때 이씨는 추운 겨울 동안 서둘러 컨테이너 집을 하나 짓고 요양병원에서 곽 할머니를 모셔왔다. 남은 생애라도 집에서 편히 모시고자 한 것이다. 대신 달라진 것이 있다. 귀국 당시 방송에서 화제가 됐지만 지난 12년 동안은 잠잠하게 살았던 곽 할머니의 삶을 세상 속으로 끌어들이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그 계기가 광주 평통사 정동석 사무국장의 방문이었고, 이후 지역 언론이나 시민단체에 알려져 할머니를 찾는 사람들이 점점 늘고 있다.

이씨는 "이모가 사람이 그리웠는지 집에 오고부터는 건강이 많이 좋아졌다. 찾아오는 사람들마다 반갑게 맞아주고 또 기다린다. 마음이 편안해져서인지 얼굴빛도 많이 밝아졌다"고 한다. 그러면서 그는 "나도 이모를 모시기 전에는 잘 몰랐다. 그런데 아직도 현실적으로 어렵게 살아가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와 가족들이 우리 주변에 살고 있다"며 "화해와 치유 재단이나 한국정신대문제대책협의회 등 재단 설립도 중요하지만 일차적으로 할머니들이 살아 있을 때 한 번이라도 찾아가 뵙고, 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진정한 위로가 아닐까 생각한다"고 따가운 일침을 던졌다.

그의 이러한 생각은 이모의 삶을 통해 확신하게 됐다. 병원에서마저 포기했던 시한부 6개월을 훌쩍 넘기고 점차 건강을 회복해 가는 이모를 보면서 '그리움이 있다는 것, 희망이 있다는 것'은 삶에 에너지가 된다고 말한다. 갑작스레 일을 놓고 이곳 산골에 들어와 살다 보니 생활에 어려움은 많지만, 어찌됐든 이모의 남은 생 동안은 어머니의 소원대로 정성껏 보살펴 주는 것이 그의 숙제다.

아픔은 일하며 잊어버렸지

다시 곽 할머니의 중국에서 삶을 여쭈었다. 하지만 이씨는 소상히 알지는 못한다고 했다. 일본군 위안부로 끌려갔을 때 받은 상처와 아픈 기억에 대해 이씨는 "이모의 말에 의하면 매일매일 일 속에 파묻혀 잊고 살았다고 했다. 이모와 중국에서 같이 살았던 이웃들도 한결같이 이모가 너무 검소하고 성실하다고 말했다. 하루도 가만히 있지 않을 정도로 부지런했다"는 평을 전했다.

곽 할머니의 이러한 입장은 한국에 와서도 마찬가지였다. 이씨는 "매년 한차례씩 한국에 시집온 일본여성들이 위문차 이모를 찾아온다. 그때마다 울면서 미안하다고 하면 이모는 '난 신경 안 쓴다. 올 필요 없다'고 말한다. 힘겹게 잊고 산 아픔을 이제와 다시 들춰내고 싶지 않은 것 같다"고 말했다.

이씨가 곽 할머니를 만나러 중국에 건너갔을 때는 재혼한 가정에 남편과는 사별하고 자녀 셋과 함께 살고 있었다. 다행히 방송을 통해 귀향을 하고 가족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그야말로 운이 좋았다. 일하며 아픈 상처를 모두 잊었다는 곽 할머니에게도 마음 깊은 곳에는 분노가 있었다. 10억엔으로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덮으려고 했던 한·일위안부협정 소식을 듣고서는 연신 "나쁜 놈"이란 말을 내뱉었다고 한다. 그 윤회의 끈을 우리는 끊을 수 있을까.

한편 광주 평화와 통일을 여는 사람들과 시민단체인 평화나비는 매주 수요일마다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곽예남 할머니 방문의 날로 정하고 만남을 이어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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