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계원 도무 / 사)삼동인터내셔널
우리집은 일원가족으로 나는 전무출신 김대승 교무의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일원가족에서 태어나는 것은 대종사의 대도정법, 법신불 사은의 가호를 받은 피은자 중에서도 사은의 혜택을 오롯이 제대로 받은 종결자, 탑랭킹 순위에 들어간다며 나름 자부하며 살아오고 있다.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부터 부모님의 독경소리, 성가 부르는 소리를 들었으니 이 세상에 나오기 전부터 은혜의 갑옷 속에서 철저한 보호를 받은 것이다.

어린 시절을 돌이켜보면 지금도 생생하고 뚜렷한 기억이 있다. 매일 아침 아버지를 따라 조깅을 하고 배산 위 바위에 앉아 좌선을 했던 기억이다. 그리고 주말이 되면 '길원 정복대'(아버지의 호적명 '김영길'의 마지막 글자 '길', 그리고 나의 호적명 '김태원'의 마지막 글자 '원'을 합쳐 만듦)는 한국에 있는 산들을 찾아 새벽부터 분주하게 집을 나섰다. 한 발 한 발 산 위에서 발을 떼며 아버지는 산에서 마구 뛰어 다니는 아들을 보며 호연지기와 '겸손의 덕'을 알려주셨다. 어린시절 부모님에게 받은 사랑과 배려의 감정은 나의 학창시절 정서를 누구보다도 비옥하게 해준 거름이 됐다. 학교와 교당에서 만나는 사람사람마다에게 관심과 보호 그리고 용서를 받았다는 것은 지금 생각해도 그 시절에 대한 크나큰 감사와 은혜로 다가온다.

아버지는 어린 자식들에게 항상 인류와 사회를 위해 공헌하는 사람으로 성장하라며 기도해줬다. 먼저 사람에게 다가가 사랑하고, 겸손하고, 배려하라는 아버지의 지도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하지만 학창시절 '호기심'이 주는 질풍노도의 경계에서 벗어날 순 없었다. 순수했지만 무모했던, 미성숙한 그때 시절을 돌이켜보면 지금도 부끄러움에 머리가 숙여진다. 사실 나는 질풍노도의 학창시절을 보내고 마땅히 진학할 대학이 없어 원광대학교 원불교학과에 입학했다. 간사생활도 하지 않고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교학대 서원관 생활을 시작해 그 당시 나는 동기들 중에서도 미보리, 가장 나이가 어린 동생이었다. 형님, 누님이라고 부르던 서원관 동지들의 보살핌으로 나는 샛길로 새지 않고 무사히 졸업을 할 수 있었다. 사실 교학대학 원불교학과 졸업 전까지도 나는 내 스스로의 주체적 삶, 전무출신의 서원이 없었고, 오직 주위 인연들의 보살핌과 인도가 전부였다. 주체적 서원이 없었던 대학시절을 보내고 졸업 후에는 해병대 장교로 임관했다. 당시 해병 장교의 삶은 내가 스스로 결정한 첫 번째 진로였다.

나는 교학대 생활을 하며 동기교무의 권유로 지원하게 된 ROTC에 선발됐다. 그리고 장교 후보생 생활과 서원관 생활을 병행하고 있을 때, 전국 대학교 육군 장교 후보생들 중에서 해병대 장교 50명을 선발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나는 나약하다고 생각했던 내 자신에게 도전의 기회를 주고 싶었다. 그 결정이 내가 주체적으로 선택한 내 인생의 첫 번째 결정이었다.

군 생활을 마치고 나니 내 자신이 어느 정도 자력이 섰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꿈꿔왔던 문화예술교화의 진로개척을 위해 스스로 연극, 공연예술시장에 뛰어들었다. 이 때가 나에게 있어 진정한 전무출신의 삶과 서원으로 살아간 시기였던 것 같다. 군복무를 마치고 공연활동을 하며 '나'라는 존재가 '은혜'의 피조물임을 철저히 깨닫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부터 나 역시 주변사람에게 은혜를 베풀 수 있는 사람이 되자'는 발심이 나기 시작했다. 비로소 전무출신으로서 내 자신에게 덜 부끄러운 삶의 주인이 된 시점이었다.

전무출신이란 삶은 그리 쉬운 길이 아니라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마음속에서 '나도 세상을 좀 더 밝고 윤택하게 한다'는 믿음이 생겨 기쁨과 보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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