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종경 법문 중 우리집 부처를 형상화한 작품. 소태산 대종사는 탐진치 삼독심이 소멸돼야 성자의 반열에 오르고, 내적 평화가 외적 평화의 중심이 된다고 밝혔다.

중도·중용, 상생과 조화
관용과 섭취불사 정신
내적 평화가 평화의 중심

최근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성주성지 배치 문제를 계기로 '원불교는 평화다'라는 말이 부상하고 있다. 그렇다면 과연 원불교의 평화사상이란 무엇일까.

평화사상과 일원진리

그것은 무엇보다도 소태산 대종사의 일원상의 진리에 근거한다.

그 구조의 첫째는 근원성으로 이 진리는 우주만유의 본원이자 제불제성의 심인이며, 우리 중생들의 본성을 말한다. 제1원인으로써의 근원은 종교적 세계의 본질을 형성한다. 인간과 만물의 본질적 근원을 문화적 전통 속에서 찾아 해석해 주는 것이 종교의 역할이라고 한다면, 모든 종교의 궁극적 지점은 곧 일원세계에서 만난다고 할 수 있다.

둘째는 원융회통성으로 유무, 주객, 음양, 성속, 생사 등 상대적인 모든 것을 넘어 불이(不二)의 세계에 들어가는 문을 말한다. 현실에서는 영과 육, 이와 사, 물질과 정신, 과학과 도학 등 회통의 관점으로 나타난다.

셋째는 원만성으로 일원상의 진리가 인간에게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원만구족하고 지공무사한 상태를 말한다. 원만성을 회복한 사회는 진리적 삶이 구현된 낙원세계라고 할 수 있다. 〈대종경〉 전망품에서 밝히고 있듯이, 모든 존재가 완전한 주체자인 부처로 우뚝 서는 동시에 상호 존중하는 용화회상과 같은 평화 세계인 것이다.

근대문명의 해독, 그리고 치유

서세동점의 근대 시기, 소태산은 식민지와 전쟁의 고통을 통해 그 원인인 제국주의와 그것을 잉태한 근대문명의 한계를 인식했다. 그 위기적 상황에서 원불교는 '물질이 개벽되니 정신을 개벽하자'는 개교표어를 걸고 출발한다. 근대문명의 총아는 과학이다. 이 과학의 균형을 바로잡는 세계가 정신, 즉 도학이다. 그 균형의 무너짐으로 인해 전통 가치가 해체되고, 인류는 자기 분열적 증상을 보인 것이다.

조지 리처(G. Ritzer)는 〈맥도날드 그리고 맥도날드화〉에서 현대문명의 대표 현상인 패스트푸드에서 규격화·편리성·효율성 등 근대성의 불합리와 비인간화를 날카롭게 비판하고 있다. 세계의 맥도날드화는 전통의 해체 및 가치의 소멸 위에서 진행되고 있다. 소태산이 불교를 수행관, 윤리관, 종교성, 인격성 등에 있어 세계적인 종교로 높게 평가한 것은 이러한 전통의 현대적 복원을 염두에 둔 것이다.

울리히 벡(U. Beck) 또한 현대문명의 위험 요인인 합리성에 대한 과학의 독점을 비판하고, 과학의 합리성에 대해 도덕적 관점이 전제돼야 한다고 주장한다. 도덕은 곧 사회, 정치, 경제의 전제 조건인 것이다. 아담 스미스가 〈국부론〉에 앞서 〈도덕감정론〉을 주장한 것은 이것을 잘 보여주고 있다.

소태산은 〈대종경〉 교의품에서 "현대와 같이 물질문명에만 치우치고 정신문명을 등한시하면 마치 철모르는 아이에게 칼을 들려 준 것과 같아서 어느 날 어느 때에 무슨 화를 당할지 모를 것이니, 이는 육신은 완전하나 정신에 병이 든 불구자와 같고, 정신문명만 되고 물질문명이 없는 세상은 정신은 완전하나 육신에 병이 든 불구자와 같다"고 보고 이 양자가 충실한 내외 문명이 병진되는 시대야말로 "결함 없는 평화 안락한 세계"라고 주장한 것과 상통한다.

이의 극복을 위해 "분별성과 주착심을 없이하며 밖으로 산란하게 하는 경계에 끌리지 아니하여 두렷하고 고요한 정신을 양성"하는 것을 삼학 정신수양의 강령으로 삼고 있다. 그러나 외부 세계의 불확실성으로부터 촉발된 데카르트의 이원론적 존재론은 현대 사회에서도 지속적인 영향을 끼치고 있다. 스피노자, 흄, 후설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비판했지만, 과학발전의 그늘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소태산은 자아분열의 기점인 개체의 욕망이 우주자연과의 분열을 낳고, 이 분열이 차별을 낳아 마침내 세계가 갈등과 대립으로 확산되고 있다고 본다. 평화의 근본은 이러한 자아 및 세계의 분열을 어떻게 통합하고 치유하는가에 달려 있다고 할 수 있다.

소태산의 평화사상

그렇다면 소태산의 평화사상의 요소는 무엇인가. 먼저 중도와 중용이다. 일원상 진리에 대한 견성과 양성의 과정을 거쳐 솔성에서 나오는 행동을 무념행·무착행·중도행이라고 한다. 정각정행, 즉 깨달음 위에서 행하는 육근의 불편불의하고 과불급이 없는 원만행이 바로 중도의 행위인 것이다. 예를 들어 살생은 인과의 연쇄만이 아니라 중도적인 삶의 평정을 파괴한다. 원불교에서 탐·진·치(貪瞋痴)의 삼독심이 소멸돼야 성자의 반열로 보는 것은 내적 평화가 외적 평화의 중심이 되기 때문이다. 이를 평화의 현실적 조건으로 환원하자면, 민주성과 공공성을 의미한다. 민주성을 시민사회의 중용적 덕성이라고 한다면, 공공성은 평화를 위한 하나의 중용적 덕목인 것이다.

둘째는 상생과 조화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인 은혜에 근원하고 있다. 이는 불타의 연기론(緣起論)에 의거한다. 불타는 이 연기를 이해하는 자는 자신과 진리 세계를 이해하는 자와 같다고 보았다. 연기사상은 대승불교의 과정에서 사회적 연기론으로 확산된다. 실상론(實相論)적인 연기론이 인간의 눈높이에 맞춘 사회적 관계론으로 조율된 것이다.

원불교에서는 이를 계승하여 절대은의 교의로 체계화한 것이다. 사회 내에서는 모두가 공존하는 동포은의 내적 원리인 자리이타가 된다. 여기에는 〈대학(大學)〉에서 말하는 종교적 황금률로써 타자를 고려하는 혈구지도의 실천적 윤리마저 포함하고 있다. 이것이 상생이다. 조화는 다양성이 존재하는 형태이기도 하다. 그것이 잘 드러난 것은 '강자·약자 진화상의 도'라고 할 수 있다. 이 도는 평화학자 요한 갈퉁(J. Galtung)이 언급한 문화적 폭력, 혹은 구조적 폭력에 대한 대응을 가능하게 한다. 진급과 강급이 순환되는 사회적 연기론에 입각한 갈등 해소의 평화적 모델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는 관용과 섭취불사(攝取不捨)이다. 관용은 절대적 신앙 앞에서 이뤄지는 종교적 행위이다. 여기에는 한 존재도 버리지 않는 섭취불사가 전제돼 있다. 불법연구회에 창부(娼婦)들이 출입하는 것에 대한 제자들의 불만에 대해 소태산은, 불성의 원리와 불법의 대자대비심에 의거하여 이들을 더욱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제도해야 한다고 표명한다. 이러한 관용은 원융한 법신불의 진리 하에서는 선과 악의 어떤 존재도 거부될 수 없음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칸트의 철학을 볼 수 있다. 그는 도덕적으로 옳은 것이 있다면, 그것이 보편적 법칙이 돼야 하고, 다른 사람을 수단으로 여겨서는 안 되며, 언제나 목적 그 자체가 돼야 한다고 한다. 칸트의 이 말은 오늘날 평화학의 기본 명제가 되어 있다.

평화사상의 계승

극단과 극단을 중화하는 데는 포섭과 섭취불사라는 자비무한의 진리적 세계관이 요청된다. 천황주의와 국가의 대외전쟁을 비판하여 1911년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일본 조동종의 '우치야마 구도'가 모든 중생은 '나의 자식'이라는 불타의 가르침에 순응한 것도 이와 다르지 않다.

동원도리(同源道理)·동기연계(同氣連契)·동척사업(同拓事業)의 정산종사의 삼동윤리는 소태산의 평화사상을 더욱 확장한 것이다. 여러 전문가들은 이를 현대 세계에 대응 가능한 보편윤리로까지 내다보고 있다. 또한 한스 큉(H. Kung)이 "종교 대화 없이 종교평화 없고 종교평화 없이 세계평화 없다"고 한 것처럼, 종교간 대화에 있어서도 중요한 테제가 될 수 있다.

대산종사가 제시한 세계평화의 3대 제언인 심전계발운동·공동시장개척·종교연합창설 또한 소태산의 평화사상에 연원한 것이다. 남북문제에 대해서는 "멸공(滅共)보다 승공(勝共)으로, 승공보다 화공(和共)으로, 화공보다 구공(救共)으로"라는 대포용의 도를 제시했다.

좌산상사는 이를 계승하여 대해원·대사면·대화해·대수용·대협력·대합의의 6가지 통일대도를 밝혀줬다. 이러한 사상들은 타자를 하나로 보고, 그 절대성을 추구한 레비나스(E. Levinas)의 현대철학과도 상통하는 것이다. 평화운동의 단초인 타자의 포용은 바로 법신불 은혜의 무한 덕상인 것이다. 이처럼 원불교의 평화론은 활사개공(活私開公)의 공공철학 또는 포용과 관용, 연대와 평화를 지향하는 녹색평화론의 핵심가치와도 소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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