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서 저술로 읽는 교사〉

▲ 대종사 성비.
원기38년(1953) 4월의 제1대성업봉찬대회는 '대종사성비(大宗師聖碑)' 건립이 하이라이트였다. 6.25 한국전쟁으로 1년을 연장한 이 성업의 회향은 대종사 열반 10주기에 해당한다. 원기34년(1949) '대종사성탑'을 조성하고, 그 동남간편의 이른바 신도(神道)에 성비를 세웠으니, 제자들의 대종사 추모에 극진한 바가 있었다.

이 성비의 비문, 곧 〈원각성존 소태산대종사 비명병서(圓覺聖尊 少太山大宗師 碑銘幷序)〉는 종법사인 정산종사의 찬문(撰文)이다. 먼저, 문장가인 유허일(柳山 柳虛一, 1882-1958)대봉도가 지었으나 교단의 공의를 얻지 못하면서 이른바 비문파동이 일었고, 결국 정산종사가 새롭게 찬술하게 됐다. 비문에서 '대종사는 새 시대의 주세불(主世佛)이요, 이 회상(會上)은 정법(正法)의 주세회상이다'라고 선언하는데, 이 사관(史觀)이 공의수렴의 맥점인 셈이다. 원기(圓紀) 연호가 처음 쓰인 것도 이 성비명이 처음이다.

황등산 화강석과 웅천산 오석(烏石)으로 조성된 성비는 크게 세부분으로 구성됐다. 기단부는 일원상·연꽃·무궁화를 새겼고, 비신은 오석으로 비문을 새겼으며, 비갓은 연꽃·원월보주(圓月寶珠)를 올려, 총 높이가 5m84cm에 이르는 큰 형태이다. 비문은 제(題)14자, 서(序)1818자, 명(銘)112자, 기(記)13자로 총 1957자이다. 송성용(剛庵 宋成鏞, 1913-1999)서백이 썼다. 원기20년(1935) 중앙총부에 대각전을 세웠을 때 전액(殿額) 등을 쓴 부친 송기면(裕齋 宋基冕, 1882-1956)서백과의 인연이 이어진 것이다.

당시 스승을 떠나보낸 제자들의 안타까움은 언설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정산종사는 이를 "때에 도중들은 반호벽용하여 그칠 줄을 몰랐고 일반 사회의 차탄(嗟歎)하는 소리 연하여 마지아니했으며 허공법계와 삼라만상이 다 같이 오열하는 기상을 보이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도중'은 제자들, '반호벽용'은 땅을 치고 울부짖으며 훌덕훌덕 뛰는 모습, '차탄'은 안타까워 혀를 끌끌 차는 것을 가리키니, 세상이 무너져 내린 정황이 극절하게 표현되고 있다.

비문은 '명'을 읊기 위해 '서'를 적는 형식인데, 성비명의 '서'는 시대상황에 맞추어 국·한문 혼용으로 밝혀져 있다. 웅대한 내용에 명문이라 읽으면 저절로 외우게 되는데, 한문운율을 맞춘 '명'은 읽기가 어려워 〈원불교대사전〉에 번역해 실었다. 과연 아름다운 글귀에 대종사의 경륜을 어떻게 실현하고, 성업을 어떻게 계승해 나갈 것인가 잘 드러나, 옷깃을 여미게 한다.

양현수 교무 / 원광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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