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불교엔 '부부 봉공상' 없나요"

부인의 삶 지탱해준 원불교 만나 제2인생
봉사하는 즐거움, 공부하는 기쁨 알게 돼

하루아침에 영하로 떨어진 초겨울 날씨에 잔뜩 웅크리고 도착한 서울 이문교당. 법당 가득 소박하게 전시된 교무·교도들의 시, 서예, 문인화 작품들이 오가는 길손님에게 따뜻한 이야기를 전한다. 낯선 타지에서 우연히 마주한 그러한 반가움으로 정양서(丁良瑞·77) 교도와 그의 작품을 만났다.

9년 전, 평생을 몸 바쳐 일해 온 직장에서 정년퇴직을 하고 지금은 제2의 인생을 산다는 정 교도는 그 중심에 '원불교'가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한다. 한국전기공사 지정업체에서 총괄관리를 맡아온 그의 하루일과는 아침 7시에 출근해 저녁 10시에 퇴근하는 숨 막히는 일상의 연속이었다. 2000년도에 들어서기 전까지는 주말도 없다시피 했다.

"전기를 다루는 일이 순간 잘못하면 안전사고로 이어지기 때문에 늘 긴장의 연속이었어요. 직원들이 출장 갔다가 돌이오기 전까지는 한시도 안심할 수 없었죠. 직원들이 다 퇴근하고 나서도 마무리는 늘 저의 몫이었으니 야근하고 집에 들어가면 아이들 얼굴 보기가 힘들었죠."

그 미안한 마음을 부인(수타원 김안신 교도)과 자식들에게 평생의 짐처럼 짊어지고 살았다는 정 교도. 그래서였는지 정년퇴직을 하고 제일 먼저 찾아간 곳이 부인의 삶을 지탱해 준 원불교 이문교당이었다.

"제가 원기64년에 입교했으니 원불교와의 인연은 아주 오래됐죠. 하지만 직장생활이 워낙 빠듯해 교당에 다닐 수가 없었어요. 저와 반대로 아내 수타원은 교당 다니고 봉사하는 재미로 살았어요. 집에 오면 몸이 아프다고 하면서도 20년을 매일 같이 남 돕는 일에 솔선수범 해왔죠. 그것이 원불교의 가르침이래요."

올해 72세인 부인은 얼마 전 서울교구 자원봉사자축제에서 1년 봉사활동 411시간을 채워 서울봉공회장상을 수상했다. 자신의 몸을 돌보지도 않고 남을 돕는다는 것, 8년 전 제2의 인생을 열어준 원불교를 만나기 전까지 그는 이해할 수가 없었다. 이제는 부인을 이해할 뿐 아니라 존경한다는 그. 그도 그럴 것이 부인의 봉공심에 이끌려 서울역 노숙자 빨간 밥차 봉사활동에도 3년째 모범생으로 활동 중이고, 주말이면 교당에 온통 빠져 산다.

토요일에는 법당 청소를 돕고, 일요일에는 법회 2시간 전부터 교당에 나와 화단정리며 현관청소를 말끔히 한 뒤 교도들을 맞이한다. 교도들에게 반갑게 인사하며 명찰, 예회보 등을 나누는 일이 그에게는 최고의 즐거움이다.

"봉사는 누가 시켜서 하는 게 아니잖아요. 스스로 마음이 우러나와야 하기 때문에 한 번 재미를 붙이면 누가 하지 말라고 해도 하게 돼요. 내가 조금이라도 젊었을 때 그 재미를 알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금에 와 많이 후회되죠."

하지만 부인의 삶을 옆에서 지켜봐 와서인지 교당에 다니고, 봉사를 시작하면서 그의 삶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고 한다.

"제가 성질이 급하고 꼼꼼해서 일의 시비를 잘 따지는 편이었어요. 직장에 다닐 때는 그 성격이 장점이 돼 최고 관리직까지 맡게 됐지만 가까운 사람들에게는 큰소리치고 꼴을 못 봐주는 사람이었던 거죠. 그 성격을 고치기 위해 '내 마음의 주인이 되자, 남을 돕고 살자, 상대방을 존중하자'는 유무념 대조로 공부를 시작했죠. 지금은 사람들이 많이 편안해졌다고 해요."

그렇게 기질변화 되기까지 몇 년을 똑같은 유무념으로 공부를 한 결과, 최근에서야 그는 경계를 맞이하는 기쁨을 알게 됐다고 한다. 봉사하는 기쁨과 더불어 공부하는 즐거움을 알고부터는 원불교를 일찍 만나지 못한 아쉬움에 그의 하루하루는 더 바빠졌다.

"내년에는 아내 따라서 원광장애인복지관 봉사활동도 시작해 볼까 합니다. 나에게 앞으로 얼마간의 시간이 주어질지는 모르지만 남은 생에라도 후회 없이 남을 돕고 싶어요."

봉사 외에도 그에게는 교당 다니는 즐거움이 하나 더 있다. 일요일마다 교도들이 제출하는 교리퀴즈정답지를 체크하는 일이다. 조환국 교무가 일요일 법회보에 교리퀴즈를 내면 교도들이 정답을 적어 그에게 제출한다. 그는 60여 명 교도들의 정답지 하나하나를 체크하며 자신의 공부도 점검한다. 그렇게 석 달 치가 모아지면 교무는 우등생에게 상을 준다. 그런 일을 마다하지 않고 성실하게 맡아준 정 교도가 교무에게는 그야말로 '숨통'이다.

"나로 인해 작은 것 하나라도 도움이 된다면 최선을 다해 돕고 싶어요. 아내 수타원이 평생을 봉공하며 살아온 그 길을 뒤늦게나마 동행하게 돼 기쁩니다. '부부 봉공상'이 있다면 내년에는 꼭 받고 싶네요."

월~금요일 낮 동안에는 동대문시립노인복지관에서 평생의 꿈이었던 서예와 그림 작업을 하고, 저녁에는 사경으로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그. 뒤늦게 공부를 하고 보니 생전에 말없이 그의 입교를 간절히 염원했던 어머니의 인자함이 눈에 선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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