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칼럼

▲ 류경주 교무 / 교정원 기획실
2만, 20만, 100만, 95만, 190만 그리고 2, 10, 100, 5만, 5·1이라는 숫자는 올 한 해 익숙하고 무게감 있게 다가왔던 숫자들이다. 전자는 국민의 성난 민심으로 뜨거워진 촛불집회 참여인원수이고, 후자는 원불교100주년을 맞이하면서 회자됐던 숫자들이다.

촛불집회에서 나타난 숫자가 자괴감, 분노, 불합리, 불법, 참여를 상징한다면 후자는 적공, 헌신, 개벽, 자부심, 참여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불합리한 국정운영으로 자괴감에 빠진 국민들은 하나둘 촛불을 들고 광장으로 모여들었다. 정직하고 합법적인 규칙에 의지해서 살아가고 있던 많은 국민들은 촛불로써 삭혀지지 않는 분노를 녹여내기 위해 광장으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그 뜨거운 용트림을 아무 조건 없이 받아주고, 그 함성의 무게를 진중하게 감싸주고 있는 곳이 광장이다.

얼마 전 교단은 상암벌 광장에서 우렁찬 환희의 기쁨을 경험했다. 10년 적공으로 쌓아온 열정과 100년의 헌신으로 만들어낸 역사의 발자취로 원불교 2세기 결복교운을 열어갈 개벽의 새 역사를 선언한 자리도 광장이었다.

광장은 다양한 생각들이 교감과 논쟁을 통해 간절함을 호소하고 왜곡된 것을 표출하는 곳이며, 공의와 합의를 통해 새로운 문화와 목표를 창출하는 공간이라고 앞선 칼럼에서 논지한 바 있다. 촛불의 열망은 교감과 논쟁을 통한 간절함으로, 상암벌의 참여는 공의와 합의를 통한 개벽의 함성으로 거듭남의 목표를 설정하고 있다. 그래서 광장은 열린공간이었다.

남녀노소 가릴 것 없이 무너져 버린 자존심을 회복하고, 허탈감에 의지할 곳을 찾으려는 이에게 광장은 열린 공간이었다. 부모가 어린 자녀를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광장으로 함께 나온 것은 다음 세대에는 같은 실수가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는 간절함으로 그 현장을 체험하기 위한 공간이었다. 부모세대는 그 답답함과 미안함을 에둘러 풀지 못하고 세대간 불편함을 넘어서고자 광장으로 발걸음을 한 것이다. 그리고 광장은 참여공간이었다.

"대통령은 일개 일반인에게 국정을 전부 내 맡겼으므로 대통령의 모든 의무를 져버린 것과 마찬가지다"고 했던 어느 여고생의 발언에서처럼 광장의 공간에는 참여의 제한이 없다. 그래서 가치가 있고, 경청의 문화가 필요한 것이다. 예술인은 예술인의 가슴으로, 청소년은 청소년의 감성으로, 농민은 농민의 우직함으로, 도시민은 도시민의 세련됨으로 참여하는 방식은 다양하고 낯설지라도 간절함을 호소하고 상대의 표현에 공감하고 배려하는 공간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광장은 소통이었다. 내가 가진 것과 아는 것을 내 이웃과 함께 나눌 수 있고 배울 수 있는 공간이다. 우리는 지난 5차례의 촛불집회를 통해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가 되고 힘이 되어야 함을 배워가고 있다. '어둠이 빛을 이길 수 없다'는 평범한 진리를 새삼 깨달아 가고 있다. 거기에는 내가 아는 것과 가진 것을 자랑하지 않고 욕심내지 않는 공유와 공감의 마음이 살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광장은 참여와 소통이 이뤄지는 열린공간으로써 공유와 나눔의 문화를 생산해가고 있다.

우리의 광장문화는 건전하게 작동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할 때이다. 열린공간으로 광장을 만들어가고 있는지, 재가출가가 함께 만들어 가는 회상공동체를 위한 다양성을 어떻게 반영해 갈 수 있는지를 고민해야 한다. 출가는 재가의 신심과 열정을 교화와 교당의 성장을 위한 동력으로 수용할 수 있는 자세를 만들어 가야하고, 재가는 출가의 헌신에 대한 존중과 감사로 신심을 키워야 한다. 주임교무와 부교무의 세대간 차이와 관습들을 수용하기 위한 제3지대를 만들어 역할분담을 통한 균형감을 찾아갈 수 있도록 열어둬야 한다.

열려있다는 것은 수용성을 의미한다. 타인의 주장과 행동들을 수용할 수 없는 광장은 또 다른 지배구조를 만드는 물리적인 틀일 뿐이다. 작든 크든 열린 공간이 필요한 것이고, 그곳이 광장이 되는 것이다. 또한 참여를 위한 합리적인 의견교환이 가능할 수 있도록 구성원들의 의식전환도 필요한 시점이다. 참여를 막으면 독선으로 흐를 수 있다. 교단의 다양한 구성원들이 이해관계를 넘어서서 화합이 제일이라 한 스승의 말씀에 의지해 나눔과 어울림을 위한 가치체계로 승화시킬 수 있는 배려가 필요한 것은 아닌지 살펴야 한다.

우리가 광장을 새롭게 인식해야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그곳에서는 차별과 분쟁, 막힘과 욕심보다는 화해와 배려 그리고 어울림과 나눔으로 만들어 가는 유기체적 공감문화가 창조되기 때문이다.

촛불의 숫자와 간절함이 희망으로 승화되고, 상암벌의 개벽함성이 결복교운으로 가는 광장이 되길 기도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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