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광주 제원한약방 지산 박종식 대호법은 현대인들의 우울증은 스트레스에서 온다며 방치하지 말고 치료에 정성을 다하면 누구나 극복할 수 있다고 말했다.
5살 때 이민 간 중국 하얼빈에서 고향 해남까지의 생사길
지인 소개로 만난 K한의원에서 일 배워 한약방 50년 세월
알게 모르게 세상에 진 빚, 남은 생 힘 닿는 데까지 돕고파

소태산 대종사는 나이 40이면 죽어가는 보따리를 챙겨야 한다고 말한다. 생과 사가 둘이 아니니 일상생활 속에서 집착을 놓고 해탈준비를 하라는 뜻이다. 여기 나이가 무색할 정도로 여든여섯의 노구에도 약을 짓는 약방할아버지가 있다. 평생을 욕심 없이 살아온 그이지만 남은 생에 꼭 이루고픈 염원이 있다며 조심스레 말을 꺼낸다.

"현대인의 우울증은 스트레스에서 온다. 특히 섬세하고 착하고 정직한 사람들이 스트레스를 더 받는다. 불안전한 사회 속에 살기 때문이다. 수행자에게도 마찬가지다. 부단한 적공으로 해탈을 얻을 수도 있지만 그 과정에서 좌절을 맛보는 것도 자연스런 현상이다. 그때에 수행으로만 이겨내려고 하지 말고 한약을 적절히 복용하면 많은 도움이 된다."

지금도 우울증이나 여성질환 환자가 입소문을 타고 그를 찾아온다. 알면 치료가 쉬울 텐데 대부분 방치하다가 병을 키운다며 안타까운 한숨을 내쉬는 그는 광주 남구에 위치한 제원한약방 지산 박종식(86·智山 朴種植) 대호법이다.

한약방을 운영한 지 50년 세월. 그는 "이 일밖에 할 줄 아는 게 없다. 좋은 인연을 만나 노하우를 전수하면 좋겠지만, 처지가 허락하는 대로 무아봉공 하는 마음으로 어렵고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돕고 싶다"고 바람을 전했다.

돌아보면 그의 삶도 녹록치 않았다. 무일푼으로 시작해 가업을 이루고 한 때는 명성도 얻었지만 전쟁 포화 속에서 수없는 생사의 갈림길과 배고픔을 참아내야 했다. 그 기나긴 사연은 중국 하얼빈으로 이민 갔던 시절이야기로부터 시작됐다.

배고픔은 일상이었다

전남 해남에서 태어난 그는, 5살 때 가족과 함께 중국 하얼빈으로 이민을 갔다. 하지만 일본군은, 독립군에게 자금을 대준다는 이유로 그곳에 있던 동포들을 중국 이화현 신흥촌으로 집단 이주시켰다. "황무지 땅을 개관해서 24개 마을을 만들었다. 내가 살던 곳이 100세대가 사는 첫 동네였다. 해방이 되고 귀국을 하는데 그 과정이 얼마나 복잡했는지 모른다. 그것도 가세가 괜찮거나 앞을 좀 내다본 사람들이나 했지, 엄두도 못 냈다"고 한다.

그의 가족은 하얼빈에서 장춘을 거쳐 심양으로 가는 귀국 일정을 잡았다. 혼란한 시기라 여객열차는 생각지도 못했다. 화물차를 겨우 임대해 하얼빈까지 오는데 6~7시간이 소요됐다.

"하얼빈에 도착해 잠시 쉬어 가려고 여관에 머물었는데, 그곳에서 가족이 전염병(장티푸스)에 걸리고 말았다. 귀국 일정이 지체되는 바람에 상황이 더욱 악화됐다"며 당시 그가 가야 할 고향땅까지는 소위 지뢰밭과 같았다고 전했다.

그의 가족은 심양으로 가는 코스를 변경해 연길로 우회하기로 했다. 그때도 열차표는 없었다. 한 번은 어렵게 섭외해 겨우 열차 위에 자리를 잡고 올라탔는데, 곧바로 적군이 쳐들어온다는 소리에 정신없이 도망쳐야 했다. "지금도 그때 기억이 생생하다. 얼마나 가슴을 졸였는지 모른다"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미 지불한 돈은 빨리 잊어버리는 게 상책이었다. 그의 가족은 다시 화물열차를 섭외했다. 밤새 달려 도착한 연길에서도 이동수단이 없어 지나가던 트럭을 얻어 탔다. 그나마 다행한 일이었다.

"돌아보면 선친의 간절한 염원 덕분인 것 같다. 선친은 어떤 일이 있어도 후손은 고향에 데려가야 한다는 의지가 강했다"며 묵혀뒀던 오랜 그리움을 꺼낸다.

어렵사리 두만강을 건너 북한 피난민 수용소까지 갔지만 당시 상황은 돈이 있어도 곡물을 살 수 없을 정도로 참담했다. 그때가 1946년 5월말경이었다. 그의 가족은 지체할 새가 없었다. 주린 배를 움켜쥐고 걷고 또 걸었다. "나중에는 너무 배가 고파서 하루 7~8km 밖에 못 걸었다. 연천쯤 도착하니 밥 짓는 냄새가 났다. 그 반가움이란 이루 말할 수 없었다"며 당시를 회고했다.

목포에서 인연된 한약방

동두천에 와서야 그의 가족은 처음으로 여객선을 타고 청량리역에 도착해 피난민 수용소가 있는 장충단까지 갔다. 그곳에서 한숨 돌리고 다음날 고향 해남으로 가기로 한 날이다. "그때 내가 15살이었는데 막상 고향에 가려니 막막했다. 귀국하면서 조선 은행권을 다 써버린 상태라서 시골에 가봤자 학교에 갈 상황도, 취직할 능력도 없었다. 그래서 아침에 혼자 몰래 나와 동대문~충무로까지 도심 한 바퀴를 돌았다. 초행길에도 전혀 낯설지 않았다. 그러다 아버지에게 잡혀 고향을 가게 됐지만, 나중에 나의 전생사를 알고 초기 경성교화이야기를 들으면서 원불교와의 인연이 보통이 아니었음을 실감했다."

고향에서 그는 천운처럼 지인의 소개로 목포 K한의원에 입사하게 됐다. 당시 한의사가 그를 믿고 많이 도왔다. 이듬해 한의원이 서울로 이전하자 그는 틈틈이 서울에서 학원을 다니며 배움의 기회도 가졌다. 하지만 한국전쟁의 발발로 모든 상황이 격변되고 그는 피신생활을 면하지 못했다. 다시 고향 해남으로 내려가기 위해 길을 떠났지만 대전에 사는 누나 집까지 가는 데에도 그야말로 천신만고의 험난한 여정이었다.

"다시 K한의원에 합류했다가 시국이 어지러워 해군을 자원했다. 4년간 군 위생관 교육을 받고 위생행정 계통에서 근무했다. 제대 후에도 한의사가 나를 받아줘 그곳에서 정식으로 임상을 익히고 31살에 목포에서 한약방을 개업했다."

그가 목포에서 한약방을 열자 입소문을 타고 환자들이 몰려들었다. 이후 서울이나 광주에서 한약방을 운영할 때에도 먼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사람들이 찾아왔다. "1960년대만 해도 의료 시설이 열악했다. 그때 약을 잘 짓는다고 사람들에게 신임을 많이 얻었다. 한때는 이것이 죄냐, 복이냐 하는 내 안의 갈등도 있었지만 정직하게만 하자고 마음먹었다."

어머니 통해 만난 원불교

원불교를 알게 된 것은 어머니 덕분이었다. 그는 "세상에 태어나서 부모님에게 손가락 짚을 땅 하나도 물려받지 못했지만, 어머니를 통해 원불교를 만난 것은 인생의 가장 큰 축복이다"고 말했다.

평생을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았던 어머니는 열반 40일 전에 몸살을 심하게 앓았다. 진단 결과 위, 간, 장에 주먹만 한 암 덩어리가 세 개나 있었다. 암 발견 후에도 어머니(김성원행)는 간병하는 며느리 앞에서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한 적이 없었다. 시어머니에게 감명을 받은 부인(민도심·74·광주교당)이 먼저 입교를 하고 그는 49일 천도재를 마치고 입교했다. 그는 "정법을 알고 공부한 지 30년이 됐다. 누구나 자기가 타고난 업이 있고 인연이 있다. 구슬을 손에 쥐어줘도 그 가치를 모르면 아무 소용이 없다. 내가 그랬다. 입문은 늦었지만 원불교 회상을 위해서라면 뭐라도 돕고 싶다"고 심경을 밝혔다.

평생을 근검절약하며 살아온 그는 광주전남교구 '사회복지법인 원빛골' 부지를 희사하고, 현 광주원음방송국이 위치한 종교부지 확보에도 큰 힘을 보탰다. 그는 인재양성만이 교단의 희망이라며, 돕고 싶은 일은 많은데 나이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탄했다.

그는 "지금도 나는 약 짓는 일 외에는 모른다. 그동안 집사람이 나를 도와 고생이 많았는데 고맙다는 말을 한 번도 하지 못했다"며 쑥스러운 고백을 했다. 그리고 꼭 마지막 하고 싶었던 말이라며 "대호법 법훈을 받은 것은 내 평생의 빚으로 알고 갚고 싶다. 또한 나를 찾아오는 손님을 모두 스승으로 알고 성심성의를 다해 약을 지었지만 혹여 자리타해가 된 사람이 있다면 평생 속죄하는 마음으로 살겠다"고 무거운 마음을 쓸어내렸다.

밤새 이어질 것 같은 이야기는 어둑해지자 마무리됐다. 운동시간이라며 그는 두툼한 모자와 장갑을 챙겼다. 여든여섯, 이 생의 빚은 최선을 다해 갚고 싶다던 그가 길을 나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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