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의 심경과 자세로 불공합니다"
황무지였던 교당 터 개척해 텃밭 일구고
수확한 농작물로 교당살림 보태니 교화 절로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이라. 지금 머무는 곳에서 주인으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이 있다면 어떤 모습일까.

교무가 없을 때에는 교당을 지키고, 일손이 비는 날에는 혼자라도 밭을 간다. 공금을 아낄 수만 있다면 장사꾼도 기꺼이 되고, 기술자도 마다않는다. 교도회장 직함보다 교당의 산주인으로 혈성을 다해온 장흥교당 진산 안용진(65·振山 安龍振) 교도.

교당 뒤편 991.7㎡여 남짓한 밭에는 안 교도의 손길이 닿지 않는 데가 없다.

"여기서 교도들과 함께 감자, 고구마, 양파, 들깨를 직접 심고 관리합니다. 교도들이 날마다 할 수는 없으니까 시간나는 대로 제가 와서 가꾸고 있지요."

잡초가 무성하면 직접 예초기로 풀을 깎고, 밭고랑을 낼 때는 직접 괭이질도 마다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런 고된 일보다 교도들과 함께 얼굴 보고 웃을 수 있어 안 교도는 너무 감사했다.

"교도들이 모여 일을 할 때면 짜장면도 불러다 먹고, 가끔은 막걸리도 한 잔씩 하면서 모두가 웃으면서 일하다 보니 어떤 때는 소풍 온 기분이 들기도 합니다. 물론 힘에 벅찬 부분도 있지만 교당이 이만큼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을 생각하면 항상 감사할 뿐이죠."

군청 뒤편에 위치했던 장흥교당은 원기91년 현재 위치한 자리로 신축해 옮겼다.

"처음에는 외곽지역이었던 곳이라 황무지 그 자체였죠. 그러다 보니 다른 곳에서 갖다버린 건축물이 많이 묻혀 있어 처음에는 이렇게 넓은 밭을 만들 염두를 못 냈습니다. 조금씩 좋은 땅에 작물을 골라 심다가 원기97년부터 건축폐기물을 모두 제거하고 복토해서 지금의 밭이 됐습니다."

건축폐기물을 제거한 자리를 복토하기 위해서는 많은 흙이 필요했다. 돈을 그만큼 쏟아부어야 했다. 하지만 군청에서 근무하던 시절 맺은 건축업계 인맥들 덕분에 운반비만 지불하고 흙을 실어 나를 수 있었다. 황무지 밭에 필요한 퇴비를 실어 나를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그가 특별히 돈을 아껴야 하는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교당을 옮기기 전 원광유치원은 군에서 알아주는 유치원이었다. 신축공사를 할 때도 유치원을 염두하고 시공에 들어갔지만, 저출산과 젊은 세대가 대도시로 빠져나가는 현상으로 결국 유치원을 열지 못했다. 억단위 빚만 남게 된 것이다.

교도들과 함께 일군 밭에서 수확한 작물을 가져다 팔기도 했다. 하다못해 교당에 수도꼭지 하나, 보일러 수리 등 돈 들어가는 일에는 교도회장 직함이 무색할 정도로 두 팔을 걷어붙이고 직접 수리에 나섰다. 이러한 정성 덕택에 빚은 1천여 만원까지 줄일 수 있었다. 그가 이렇게 교당의 주인으로 거듭나 혈심혈성을 다할 수 있었던 데에는 아내 백희명 교도와 자녀들이 있었다.

장흥교당 원광유치원에 두 아들이 들어가면서 아내에 이어 안 교도도 입교하게 됐다. 처음에는 크게 신심이 나지 않았지만 두 아들이 광주로 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뜻하지 않는 주말부부가 됐다. 하지만 아내와 함께 나간 광주교당에서 신앙을 찾았고, 아이들도 원불교 신앙으로 건강하게 잘 풀렸다.

"두 아들 뒷바라지 한다고 아내는 광주에 있고, 저는 군청에 다니면서 주말에 광주에 올라가는 생활이 되니 말 그대로 주말부부가 됐지요. 그런데 아내하고 두 아들과 함께 교당을 다니다보니 발심이 나서 서툴지만 신앙·수행을 시작할 수 있었어요. 그 뒤로 첫째 아이는 전남대학교 들어가서 원불교동아리 전남지역 연합회장도 하고, 둘째 아이는 서울시립대 들어가서 서울교구 대학생연합회 회장도 지냈습니다."

지금은 종교가 없던 두 며느리들도 교도가 됐다. 장흥에 오면 며느리들과 교당에 오는 게 제일 좋다는 안 교도.

"지금 생각해보면 가장 중요한 게 가족간 화합인 것 같아요. 아이들은 어려서부터 저하고 숨김없이 터놓고 이야기하는 사이였지요. 또 아내하고 부부싸움을 한 번도 한 적이 없었습니다. 항상 아내를 존중했지요. 나 혼자만 잘해서 되는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오늘이 있기까지 그 바탕에는 원불교가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 같아요."

자녀들과 스스럼 없이 소통하는 친구 같은 아버지, 아내 생일 아침이면 혼자서 교당에서 기도를 꼭 챙기는 남편이지만 알뜰한 일원가정이 될 수 있었던 것은 원불교 덕분이라고 말했다.

사이좋은 부부는 토요일 저녁 제사 지내러 서울을 다녀와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서도 일요일 아침 법회를 어김없이 참석했다. 손발이 잘맞는 교도회장 남편과 봉공회장 아내는 참기름, 매생이, 양파 장사를 하면서 교당 보은활동에 최선을 다했다. 이를 본받았는지 한 번씩 장흥에 내려오는 두 며느리도 피곤한 일요일 아침이지만 법회는 꼭 참석했고, 4축2재에는 두 팔을 걷어붙이고 설거지와 각종 수발 드는 일에 직접 나선다.

"제 아버지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주인이 99모 가면, 객은 1모 가더라.' 주인의 심경과 자세를 강조하시곤 하셨지요. 한 번씩 그 말씀이 떠오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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