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문사경 체험수기 대상작
감각 감상은 한편의 추억

▲ 이정오 교도/충주교당
저는 원기49년에 입교했습니다. 당시 고등학교 3학년이었던 저는 그 후 공부나 신앙 생활에 대한 취미라기보다는 재미가 있어서 교당에 다녔습니다.

그러다 결혼을 하였고 아이들도 셋을 두었으며, 직장 따라 여러 곳으로 이사를 다니다가 대구에 정착을 하여 자연히 대구 서성로교당에 적을 두었습니다. 제가 전주교당 청년회장을 할 때 교무님이셨던 순타원 김성주 교무님께서 서성로교당에 재직하고 계셨기에 인연을 맺게 된 것입니다. 그 후에 부임하신 수타원 유의명 교무님께서 '교전쓰기'라는 공책을 교당에 비치하고 공부를 독려했지만 그 때만해도 이에 관심을 두는 교도는 없었습니다.

어느덧 대종사님께서 가르치신 대로 죽음의 보따리를 준비하여야 한다는 40대 중반에 이르자 조급증이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아무리 생각하여 보아도 제가 완숙한 교도라는 것을 증명할 만큼 갖추어진 인격이 아무것도 없다는 허망함이 저를 짓눌렀습니다. 출구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공부를 해야지'하고 독하게 마음을 먹었습니다. '어떤 공부를 어떻게 한단 말인가?'. '그래, 가장 쉬운 공부부터 시작하자.'

〈정전〉을 보면 '경전은 우리의 지정 교서와 참고 경전 등을 이름이니, 이는 공부인으로 하여금 그 공부하는 방향로를 알게 하기 위함이요'라는 말씀이 있었지만 이 말씀 뜻도 모르고 무조건 덤벼들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당시로써는 상상도 못한 큰 공부의 문을 열고 그 첫걸음을 시작한 것이 지금 여기까지 오게 됐습니다.

필경 시대

교당 책장에는 '교전쓰기' 공책이 나란히 줄을 지어 꽂혀 있지만 누구 한 사람 거들떠보지도 않은 채로 처음 진열할 때의 그 모습 그대로 서 있었습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저는 '교전 쓰기를 해야겠다!'라는 결심을 하게 되었습니다.

우선 대학노트 한권을 사경하여 교무님께 드렸습니다. 이 때 사경을 한 경전은 〈정전〉, 〈대종경〉, 〈정산종사법어〉 중 〈세전〉, 그리고 〈법어〉였습니다. 이것이 소위 '필경'의 시작을 알리는 신호였습니다.

교무님께서는 제 사경 노트 모서리에 큰 글씨로 '교전쓰기 이정오'라고 써 붙인 후 교당 책장에 진열을 하셨습니다. 이 때가 원기83년이었습니다. 저는 두 권을 더 쓰기로 다짐하고 이어서 바로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원기86년까지 대학노트 3권을 완성하였습니다.

저는 마음속으로 '이 세 권의 교전쓰기 공책을 아들과 두 딸에게 후일 선물로 주리라' 작정을 하고는, 충주로 이사 올 때 전부 찾아서 가지고 왔습니다.

디스켓에 사경하던 시대

저는 교사 임용을 기연으로 충주에 왔습니다. 임용을 위해 어렵사리 컴퓨터 실력을 키운 저는 디스켓을 컴퓨터 본체에 꽂고 사경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세 아이들에게 줄 선물은 다 준비 완료 하였지만 이제 사경 공부에 어느 정도 힘이 생기니 그 즐거움과 법열로 인해 사경을 안 할 수가 없을 만큼 되었습니다.

사경을 마치면 저장하기를 유념하였고, 그 다음에는 그것을 가지고 교당에 가서 교무님께 감정을 받았습니다. 당시 충주교당 교무님이었던 건타원 최성양 교무님께서는 저의 사경 맨 끝에 제가 참고해야 할 한 말씀씩을 꼭 덧붙여 주셨습니다. 참 고마운 스승님이십니다.

'일원상 서원문' 사경

충주교당에 다니던 어느 날 교무님은 어느 교도님 댁을 함께 방문하자며 청을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 부부는 교무님이 운전하는 승용차를 함께 타고 가는데, 교무님이 혼잣말처럼 "일원상 서원문을 하루에 한 번씩 사경한다면 참 좋을 것 같지요?" 하십니다.

저는 그 말씀에 마음이 딱! 하고 멈추어 지면서, '그래 맞다. 그러면 참 좋겠지. 일원상 서원문 하루 한 번 사경이야 어려운 일은 아니지'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날부터 하루에 한 번씩 '일원상 서원문' 사경을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마침 그땐 저의 컴퓨터 실력도 조금씩 향상하는 중이었습니다. 저는 '한글' 프로그램을 이용하여 하루에 한 번씩 사경하였고, 이를 또 저장하기 시작했습니다.

인터넷 법문 사경 시대

드디어 지금부터 6년 전, '인터넷 사경 시대'가 그 막을 올렸습니다.

저는 원기95년 9월27일에 인터넷 법문 사경을 시작하였는데, 지금 28회를 마치고 29회째 하고 있습니다. 그 6년 동안의 정확한 기억은 없습니다만 총 이틀 정도 결석을 하였지 싶습니다. 한 번은 어머니 열반 때였고, 또 한 번은 컴퓨터가 완전히 망가져서 바꾸느라 그렇게 되었습니다. 그래도 가장 가까운 시점의 기억에 의하면 작년에 이어 올해에도 2년 연달아 아내와 함께 개근을 하고 있습니다. 지내 놓고 보니 비록 짧은 분량의 사경일지라도 쉬지 않고 사경을 할 수 있었던 정성스러운 지난날들은 끊임없는 힘을 기르는 데에 큰 도움이 되었으리라 생각하고 '천지은의 성, 팔조의 성, 성경신의 성'을 실천하였다고 자부합니다.

아내와 함께 하는 사경

이 법문 사경을 하는 기간에 제가 가장 자랑거리로 생각하는 것은 어쩌다 먼저 컴퓨터 사용법을 익힌 입장에서 제가 다시 아내에게도 컴퓨터를 가르쳐 줌으로써 함께 정보화 시대를 공유한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보다도 더 큰 보람은 아내가 저와 함께 법문 사경을 한다는 사실입니다. 저희 두 사람은 저의 원에 따라 교당에서 결혼식을 올렸고, 젊은 시절 언필칭 '나일론 교도'였지만 이제는 어엿한 교무의 부모로서 교도 노릇도 뒤처지지 않을 만큼은 하려고 서로 돕고 노력하며 살고 있습니다. 신앙생활을 함께 하는 가운데 법문 사경도 함께 하니 가정생활이 더 원만해지는 것 같습니다.

소를 물가에까지 끌고 갈 수는 있어도 그 물을 먹일 수는 없듯이 우리네 공부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저희 두 사람 모두 컴퓨터 앞에 앉기는 쉬워도 여여한 마음으로 법문 사경에 임하기란 참다운 공부심이 아니고는 어려운 일임을 새삼 깨닫는 중입니다. 어쨌든 아내가 저를 믿어서 그리 된 것은 결코 아닌 줄 알지만 이 법을 믿고 함께해 주니 더 없이 고맙고, 대종사님의 은혜가 한량없습니다.

감각 감상을 기재하는 사경

이제 감각 감상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법문 사경을 하면서 자세히 보니 사경창에 '감각 감상'이라는 창이 보였습니다. 그래서 이 창이 몇 개나 있는가를 살펴보니 법문 단락마다 설치되어 있었습니다. '아! 이것이다. 그렇구나! 법문마다 감각 감상을 쓰라는 말이구나. 전산실 교무님들이 참으로 고마운 분들이시구나' 하는 감탄이 절로 나왔습니다. 법문 사경을 하며 감각 감상을 함께 기재하는 것은 큰 공부가 되리라는 생각에서였습니다.

저는 바로 이 감각 감상을 기재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첫 번째 글이 〈대종경〉 천도품 20장 법문의 감각 감상이니, 그 날이 원기95년(2010.11.30)으로 인터넷 사경과 동갑의 나이를 가지고 있습니다. 이렇게 기재하기 시작한 감각 감상은 원기101년 9월27일 현재 총 1591회의 횟수에 이르고 있습니다.

이 감각 감상은 대부분 저의 소박한 감각 감상과 심신 작용 처리건, 의두 요목, 성리, 대적공실 법문 공부담이고, 외부 인사의 공부담 약간, 용어사전의 해설 약간 등 여러 분야의 글들이 망라되어 있습니다. 이는 나름 제 삶의 감각 감상으로서 대종사님을 그리워하고 갈망해온 한 편의 추억이기도 합니다. 감각 감상과 심신 작용의 처리건은 판타원 이효원 교무님께 주로 감정을 받았고, 의두와 성리 대적공실 법문은 왕타원 고원선 교무님께 감정을 받았습니다.

교리 법회 진행

저의 공부하는 모습을 좋게 보아주고 계시던 판타원 이효원 교무님께서 어느 날 절 부르셨습니다. 마침 젊은 교도들로부터 "교리공부를 하였으면 좋겠다"는 의견이 들어 왔다고 하시면서 저에게 그 강사를 맡아보라고 하셨습니다. 저는 여러 가지 이유를 들어 사양을 하였습니다.

그럼에도 교무님은 제 사양을 받아 주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저는 "그러면 15일간의 말미를 주십시오"라고 말씀을 드리고는 이 일을 연마하여 보았습니다. 교무님께서 이렇게 큰일을 맡겨주시는 것은 더욱 부지런히 법문사경과 교리공부를 하여 실력을 키우라는 뜻이리라 짐작이 갔습니다.

결국 "제가 해보겠습니다"라고 부끄러운 답을 올린 후, 원기99년 1월부터 12월까지 1년에 걸쳐 매월 넷째 금요일마다 교리 법회를 진행하였습니다. '교리는 어려운 것'이라는 선입견도 있었고, 공사 간 다망한 현실도 없지 않았기에 많은 수가 참석하긴 어려웠습니다. 그래도 6명에서 10명 정도가 꾸준히 참석하여, 서로를 도와가며 즐겁게 공부하였습니다. 이처럼 교리 법회를 진행하게 된 것은 어쩌면 많은 사경과 감각 감상 기재가 동기가 되어 이루어진 일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닫는 글

지금 생각해 보면 우리네 긴 인생길처럼 끝이 없는 경전 사경이 제 '인생 자체'가 될 줄은 단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그렇지 않습니다. 사경은 곧 제 인생, 바로 그 자체입니다.

저희 집은 대화의 대부분이 원불교에 관한 내용입니다. 부부가 마주 앉으면 그 대화내용도 모두 서로가 묻고 답하는 문답 감정입니다. 방송도 원음방송을 가장 즐겨듣고 즐겨봅니다. 시간만 나면 사경을 하고 문답 감정한 이야기를 모아 감각 감상을 기재하고 하는 일들이 이제는 모두 저희의 당연한 일과가 되었습니다.

〈대종경〉은 〈정전〉에 대한 대종사님의 감각 감상이고, 그리고 심신작용 처리 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또한 몸소 실천하신 바를 예시하여 모든 제자로 하여금 성불의 길에 쉽게 들도록 안내해주신 안내도면입니다. 개의 죽음에 천도재를 지내주신 법문은 '사생이 일신이니 인상(人相)으로부터 벗어나서 너희들도 짐승의 죽음을 이렇게 맞이하라'는 교훈이고, "그대의 말이 그럴 듯하나, 또는 그대의 말이 대개 옳으나" 등의 표현은 누구의 말이든지 긍정의 마음으로 대화하라는 교훈이요, 어린 아이에게 경박한 말을 쓰지 말라는 말씀, 한 푼이 아쉬운 그 어려운 상황에서도 소유 토지 전부를 희사하는 이청춘의 뜻을 재고하여 보라 하시는 말씀 등도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들에게 크나큰 산 경전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어느 법문 하나인들 소홀히 할 수가 없습니다. 강밥으로 끼니를 때우시는 장면을 떠올릴 때면 사경을 하다가도 목이 맵니다.

저는 지난달 '대한문인협회' 신인문학상을 수상함으로써 수필 작가로 등단하였습니다. 물론 협회에서 제게 작가의 옷을 입혀 더욱 성장케 하려는 뜻일 것이나, 부족한 글 솜씨가 서서히 좋아진 데에는 사경과 감각감상 기재가 도움을 준 것이라 생각합니다.

저는 법문 사경을 통하여 다시 태어났고, 다시 입교하였으며, 다시 법호를 받았습니다. 얼마나 크고 거룩한 영광이요 홍복인지 모릅니다. 이 큰 영광을 이번 생뿐만 아니라 영생을 두고 영원히 누리기 위하여 이 일을 쉬지 않고 할 수 있기를 서원합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