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덕권 교도/여의도교당
생사란 삶과 죽음을 아울러 이르는 말이다. 그러나 살아도 죽은 사람이 있고 죽어도 영원히 살아있는 사람도 있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최근에 탄핵을 당한 박근혜 대통령은 살아있으되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 아닌가.

이제 나도 얼마 안 있으면 서산을 넘어가야 할 몸이다. 과연 후세 사람들이 나의 죽음을 어떻게 기억해 줄까. 그 생사에 대해 알아본다. '생(生)'은 새싹이 돋아나는 모양을 형상화했다고 한다.

여기서 '나다'라는 뜻이 나왔다. 반대로 '사(死)'는 앙상한 뼈(尸) 앞에 사람(人)이 꿇어앉아 애도를 표하는 모습이다.

글자에 앙상한 뼈, 부서진 뼈란 뜻의 '알'이 들어가면 죽음과 관련된 의미를 갖는다. '따라 죽을 순(殉), 재앙 앙(殃), 쇠잔할 잔(殘)' 등이 다 그렇다.

옛날엔 신분에 따라 사람의 죽음을 다섯 가지로 나누어 불렀다.

1. 임금이 죽으면 붕이요, 2. 제후가 죽으면 훙, 3. 대부는 졸, 4. 선비는 녹을 타지 않고 죽는다는 뜻에서 불록, 5. 서민은 사라고 했다. 그리고 사와 망은 구별했다. 죽었지만 아직 장례를 치르기 전에는 사라고하며, 이때는 죽은 이를 사자라고 부른다. 그러나 사람이 죽어 장례까지 다 마친 뒤에는 망이라고 불렀다. 이때는 죽은 이를 망자라고 부르는 것이다.

또한 장사를 지낸다는 뜻의 '장(葬)'은 죽은 이의 위아래를 풀로 덮은 형상이다. 옛날에 사람이 죽으면 들이나 숲에 갖다 놓던 장례 습속이 반영돼 있는 것이다. 이 경우 시신이 야생 동물에 의해 훼손당할 수 있다.

이 때문에 망자와 가까운 이들이 화살을 갖고 며칠씩 시신을 지킬 수밖에 없었다. 조문한다는 뜻의 글자인 '조(弔)'가 활(弓)과 사람(人)으로 구성돼 있는 것은 이런 풍습을 반영하는 것이다.

최근엔 조문할 '조(吊)'자가 널리 쓰인다. 이는 '조(弔)'의 속자다. 조(吊)는 곡(哭)을 하는 입(口)에 조문의 등(燈)을 매다는 헝겊(巾)이 더해져 만들어진 글자다. 시신을 들이나 야산에 버린 뒤 활을 들고 지켜주던 습속이 사라지고, 대신 곡을 하며 등을 달아 장례를 치르는 풍습이 유행하면서 조(弔)보다는 조(吊)가 많이 쓰이게 됐다고 한다.

이 생사라는 말은 범어(梵語) 'samsara'의 번역이고 윤회로도 번역한다. 업인에 의해서 육도의 미계에 태어나서 죽기를 거듭하여 윤회하는 것으로 열반의 반대를 말한다. 생사가 끝없이 계속되는 것을 밑바닥을 알 수 없는 바다에 비유해서 생사의 바다라고도 한다. 생사의 고해를 넘어 열반의 피안에 이르는 것이 쉽지 않다. 그래서 건너기 어려운 바다라고도 부른다.

생사의 종류도 여러 가지가 있다. 그 어려운 말 중에 우리가 이해 할 수 있는 두 가지 생사에 대해 알아보자.

첫째, 분단생사(分段生死)다.

유루의 선악 업을 인으로 삼고, 번뇌장을 연으로 삼아 삼계안의 추한 과보를 받을 때의 생사다. 그 과보는 수명의 장단이나 육체의 대소 등 일정한 제한을 지니기 때문에 분단신이라 한다. 그 분단신을 받아서 윤회하는 것을 분단생사라 한다.

둘째, 변이생사(變易生死)다.

아라한, 벽지불, 대력보살은 분단생사를 받는 일은 없다. 그러나 무루의 유분별 업을 인으로 삼고, 소지장을 연으로 삼아 삼계 밖의 수승한 과보의 몸 즉, 뜻대로 몸을 받는다.
이런 몸을 지닌 채 삼계안에 와서 보살의 행을 닦아 불과에 이른다. 그 몸은 비원(悲願)의 힘에 의해 수명이나 육체를 자유롭게 변화시킬 수 있으므로 변이신이라 하고, 변이신을 받는 것을 변이생사라 한다.

어떤가? 생사도 깊이 들어가면 상당히 어렵다. 어쨌든 우리들이 공부를 하는 것은 생사를 초월하여 대 자유를 얻자는 것이다. 견성하여 불지를 얻어 열반에 이르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생사의 경계는 무엇인가? 찰라 생(刹那生) 찰라 멸(刹那滅)인가?

영원히 존재하는 불성이 있어 '불생불멸'인 것이다. 우리가 생사를 초월하는 공부를 하려면 생사의 경계를 모르고는 불가능한 일이다. 생사라는 의미가 의사의 사망진단만으로 끝나는 일은 아닐 것이다.

어쩌면 우리가 공부를 하여 생사를 초월할 때, 이 말의 의미를 진정으로 알지 모르겠지만 그냥 죽음이라는 말과는 구분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범상한 사람들은 현세 사는 것만을 큰 일로 안다. 그러나 지각이 열린 사람들은 죽는 일도 크게 안다. 그것은 잘 죽는 사람이라야 잘 나서 잘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생은 사의 근본이요, 사는 생의 근본이다. 그러므로 이 생사문제를 해결하는 데에는 조만이 따로 없다고 했다.

그래서 나이가 40이 넘으면 죽어가는 보따리를 챙기기 시작해야 우리가 죽어 갈 때 종종걸음을 치지 않는 것이다. 사람의 생사는 비하건대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또 숨을 들이 쉬었다 내쉬었다 하는 것과도 같고, 잠이 들었다 깼다 하는 것과도 같은 것이다.

이 생사는 조만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이치는 같다. 생사가 원래 둘이 아니요, 생멸이 원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깨치지 못한 사람은 나고 죽음을 생사라 하고, 깨친 사람은 이를 변화라 하는 것이다.

인간의 모든 고락, 원래 실상이 없는 것, 자성을 관조하니 본래 탕평하도다.(人間苦樂元無實 自性觀照本蕩平)
실상이 없는 것에 매달려 고통을 받지 말고 우리 이제는 생사를 관조하며 변화에 대비할 때가 되지않았을까.

※ 다음호부터는 정도상 작가의 사물들에 대한 단상을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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