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통 성자들의 동네 '승리가 꽃보다 먼저 오리라'

▲ 성주에서 평화는 일상이다. 원불교는 이 평화와 위로로 마음들을 어루만지며 투쟁을 함께 하는 동지이자 신념이다. 성주에서 원불교는 군민들과 함께 숨쉰다.
굽이굽이 낙동강 길 내려오다 보면 금오산 지나 작달막한 봉우리들에 안겨있는 동네를 만난다. 예로부터 땅이 비옥하고 사람들 정이 깊다는 경북 성주.

〈택리지〉에서 성주는 "논이 기름져서 씨를 조금만 뿌려도 수확이 많다. 고향에 뿌리박고 사는 사람들은 모두 넉넉하게 살며 떠돌아다니는 자가 없다"고 하며 "산천이 밝고 수려하여 고려 때부터 문명이 뛰어난 사람들과 이름 높은 선비가 많았다"고 했다.

〈양사당기〉에도 '순박하며 인정이 두텁다'고 했던 성주 사람들은 참외와 쌀, 수박을 지었다. 맺히는 것마다 달고 탐스러워, 분지에는 돈도 고이고 신념도 학식도 고였다. 조선의 마지막 유학자이자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과 문장가 김우옹 같은 얼굴들이 이 넉넉함 속에 나고 자랐다.

훗날 농촌이 기울어 산천의 집들이 비어가도, 성주만큼은 고향에 되돌아오는 사람들이 끊이지 않았다. 농사로도 먹고 살 만했고 농민회도 힘이 셌다. 인구 4만5천, 한 집 건너 수저 개수까지 다 알고 있으니, 착하고 여유롭게 살기 좋았다.

사드, 처음으로 반기를 들고 구호 외쳤다

동네가 술렁인 것은 여름, 참외를 따던 어느 오후였다. 대포같은 무기가 들어온다는 흉흉한 소문은 돌았지만 이렇게 빠르고 막무가내일 줄은 몰랐다. 사드라고 했다. 전자파가 뿜어져나온다고, 이제 누가 참외를 사겠냐고 웅성댔다. 자식같이 길러 진짜로 자식을 길러내준 참외에 전자파라니, 큰일이었다. 칠곡이었다가 성주읍이었다가 초전면으로 바뀌는 동안, 내 뒷마당으로 들어온다는 동네는 득달같이 모여 항의를 했다.

투표일이면 1번 찍는 것이 국가 위한 일인 줄 알고, 나랏일에는 덮어놓고 찬성하던 사람들에게는 처음이었다. 숫제 빨갱이들이나 할 법한 우세를 감내하며 생각했다. 나 사는 곳엔 안된다, 여기만 아니어라, 열중 여덟아홉이 밀어줬던 우리다, 어찌 이렇게 뒷통수를 치느냐.

처음 정부에 반기를 들고, 900명 넘게 머리를 깎고, 소리높여 구호를 외친 성주군민들은 점점 빨라진다는 배치 결정에 발을 동동 굴렀다. 누구에게 말해야 딴 동네로 갈 것인지 궁리해야 했다. 모이면 무조건 절대 안된다고부터 했다. 학연과 지연, 혈연을 타고 군수며 공무원, 국회의원들을 만났다. 동네에 문제가 생기면 그렇게 해결해왔기에 될 줄만 알았다. 따라온 것은 좌절과 안팎의 반목이었다.

평화의 성자이자 고향어른인 정산종사

원불교 역시 온 힘으로 기도하고 있었음을 깨달은 것은 그 즈음이었다. 초전면 사드 배치 예정지 길목에 있는 성지가 정산종사 탄생·구도지라고 했다. 소태산 대종사를 잇는 2대 종법사이자 '평화의 성자'로 불리는 고향 어른이었다. 이곳이 성지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원불교는 '내 동네에서 사드 반대'가 아닌, '사드 말고 평화'를 외쳤다. 성지 수호보다 한반도 평화를 먼저 외쳤고, 미국과 중국 사이의 역학관계보다 대한민국 국방주권의 회복을 더 크게 말했다.

내 뒷마당엔 안된다고 외치던 성주는 서서히 달라졌다. 사드는 동네의 문제가 아니라 국가의 문제요, 내 먹고사는 차원이 아닌 이 땅의 평화에 대한 것이었다. 성주는 '반대'보다도 '평화'를 먼저 외칠 줄 알게 됐다. 매일 저녁 평화광장에서 촛불을 켜며, 그것이 하나의 문화이자 평화의 투쟁임을 깨닫게 됐다. 내 농사, 우리집에 머물러있던 인식이 서서히 성주와 한반도, 세계로 커져갔다. 원불교가 매일 이어가는 두 번의 기도, 교무님 혼자라도 묵묵히 지켜가는 그 약속의 위력을 믿게 됐다.
▲ 페트병으로 '지지않는 평화꽃'을 피워내는 성주.
뾰족해진 성주의 마음 감싸안은 원불교

원불교는 성주에게 또한 위로였다. 늘 옹호하고 찬성해오다 처음으로 반대와 투쟁을 하는 사람들의 마음은 칼날같이 뾰족하고 거칠었다. 성주군청 앞 평화광장이 쫓겨나고는 길바닥에서 해야 한다는 쪽과 주차장에라도 들어가자는 쪽으로 나눠 싸우기도 했다.

허나 종교의 힘은 셌다. 기도식에는 사람들이 모였고, 성주성지에 상황실을 두고 기운을 받아가며, 매일 촛불집회 때 대산종사 선체조로 얼어붙은 몸과 마음을 녹인다. 산 속이나 토굴이 아닌 저잣거리로 나온 종교, 차가운 바닥 위 촛불을 켜는 교무들, 전국에서 발길을 잇는 교도들. 이제 성주에서의 원불교는, 종교를 뛰어넘은 하나의 신념이요 동지다.

크게 깨었고 달라졌다. 웅크려있다 고개를 드니, 세상은 하나의 색깔로만 이뤄진 게 아니었다. 바위같았던 지지율이 급감하고, 홀로였던 다른 목소리들은 규합했다. 고향으로 돌아온 젊은이들과 군민들이 앞장서고, 진실에 눈 뜬 어르신들이 이를 받쳤다. 이장들과 부녀회장, 청년회장들이 마을을 다니며 실상을 알리고, 어르신들은 낮에는 농사를 짓고 메주도 띄우다 저녁이면 평화광장으로 모인다. "다른 사람들 안 올까봐 나라도 왔다"는 이유로, 비가 오거나 갑자기 추워진 날에는 촛불이 더 늘어난다. 제대로 된 교육도 못 받고 평생 농사만 지어온 7~80대까지도 공동체의식으로 거듭난 것이다.
▲ 내 뒷마당에는 안된다, 어찌 뒷통수를 치느냐던 성주는 이제 한반도를 넘어 세계평화로 그 외침을 키워냈다.
"아직 힘 남았을 때 한번이라도 더 와야"

한 겨울이지만 참외 농사로 바쁜 성주, 군민들은 각자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만큼 힘을 보탠다. 자식 생일이라고 떡을 돌리는 할아버지, 집회 전 난로를 피우는 청년, 고구마를 익혀 나눠주는 할머니, 난생 처음 사람들 앞에서 발언해 보는 아주머니, 작은 손에 쓰레기를 든 아이. 우리가 그토록 부르짖는 평화는, 공동체에 손 넣어주는 바로 이 마음들에 내려앉아 있었다.

수요일마다 소성리 마을회관에서 열리는 성주-원불교-김천 연대 집회에는 전국 곳곳의 발길들이 함께 한다. 14일 익산에서 왔다는 비교도 농민은 "성주가 원불교 2대 종법사 성지라던데, 익산은 원불교 총부가 있는 성지다"는 인연을 짚었다. 이날 성주성지사무소 차를 타고 촛불집회에 간 초전교당 김성주 교도는 "추운 날은 못 나갔는데, 오늘은 다행히 날이 풀려 왔다. 나이가 여든이라 아직 힘이 남았을 때 한번이라도 더 가야한다"고 말했다.

촛불 든 농부 하나하나가 다 성자

촛불집회에서는 촛불과 함께 평화꽃이 나뉘어지고 있었다. 미술치료 전문가들이 페트병들로 만들기 시작한 평화꽃은 성주의 좌절과 분노를 어루만져왔다. 군청 마당에서 쫓겨났을 때 그만뒀지만, 군민들의 요청으로 촛불 아래서 꽃을 피워냈다.
"이게 절대 지지 않는 꽃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절대 질 수 없어요."

절대 지지 않는 투쟁, 질 수 없는 싸움. 그 깊은 곳에는 116년 전 이 곳에서 나고자란 평화의 성자 정산종사가 있다. 가장 평화로운 동네에서 진정한 평화를 찾는 여정, 바로 이 곳에서 한반도와 세계를 평화로 담는 큰 마음들이 거듭나고 있다. 성자가 나신 곳 성주. 깨치고 보니 이미 이곳은 개벽이요, 촛불 든 농부 하나하나가 다 성자다. 봄쯤에는 꽃보다도 승리가 먼저 오리라. 이것은 아주 보통의 성자들의 싸움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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