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한 교수의 현대건축이야기

▲ 노들섬은 인간의 개발 및 자본 논리로 파헤쳐졌던 슬픈 역사를 품은 채 지금은 방치돼 있다.

노들섬에 마을이 들어선다고 한다. 시민공모와 국제현상설계공모전을 통해 당선된 '노들마을'안에 의하면 '실내·외 공연장과 공원, 상점가 그리고 생태교육시설 등을 산책로와 골목길로 연결해 하나의 작은 마을'을 만든다고 한다. 그동안 서울시가 이곳을 텃밭으로 사용하는 것에 대해 말이 많았다. 이렇게 가치 있는 땅에 오페라하우스 정도는 지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다. 하지만 텃밭이든, 오페라하우스든, 마을이든, 노들섬이 그동안 방치되었던 것으로 보는 논리는 모두 똑같다. 사실 노들섬 만큼 특정 시대의 가치관에 의해 지속적으로 '포획'당한 곳도 흔치 않다.

노들섬은 원래 거대한 백사장의 작은 모래 언덕이었다. 갈수기에는 갈대숲 위로 지는 석양이 아름다워 용산8경 중 하나로 불리기도 했다. 하지만 작은 모래 언덕의 운명은 1917년 일제가 이곳을 지나는 인도교를 놓으면서 바뀌게 된다. 교각을 놓기 쉽게 석축을 둘러 인공섬을 만들면서 본격적으로 섬으로 인식되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물 가운데 있는 섬'이라는 뜻의 중지도(中之島)라 불렸던 것도 이때부터이다. 인도교가 놓이고 점차 유원지로 활용되던 노들섬은, 광복 후에 본격적으로 서울 시민의 대표적인 문화사회적 공간으로 변모하게 된다. 주변 모래밭은 '한강 백사장'으로 불리면서, 여름에는 피서지로, 겨울에는 스케이트장으로, 심지어 대통령선거 유세장으로도 활용되었다. "못살겠다, 갈아보자"는 표어로 유명했던 해공 신익희(海公 申翼熙, 1894~1956) 선생의 선거 유세를 보기 위해 1956년 5월3일에는 무려 30만이 백사장에 운집하기도 했다. 하지만 1968년부터 시작된 한강개발계획을 위해 모래를 퍼내면서 아름다운 백사장은 거의 사라졌고, 1973년 콘크리트 옹벽을 둘러 노들섬을 확장하면서 아예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리고 개발에 참여한 민간 기업에 섬이 넘겨지면서 우리의 삶에서도 사라져버렸다. 노들섬이 다시 돌아온 것은, 2005년 서울시가 섬을 매입해 거대한 오페라하우스를 짓겠다고 발표하면서 부터이다. 하지만 그 역시 시장이 바뀌면서 지어지지 않았고, 대신 그 자리에는 농작물을 키우는 '노들텃밭'이 들어섰다. 그리고 이제 그곳에 '마을'이 들어선다고 한다.

노들섬의 역사를 보면, 우리는 마치 용도에 안달이 난 것 같다. 교각을 세우기 위한 용도를 시작하여, 개발을 위한 채석장으로, 이익과 권력을 위해 주고받는 선물로, 문화예술공간으로, 그리고 다시 마을까지… 시대마다 가치관은 변하지만 노들섬을 효용성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변함이 없다. 그들에게 노들섬은 그저 방치된 공간일 뿐이다. 문화예술이던 마을이던, 개발이던 보존이던, 특정한 기능을 부여할 수 없는 어떤 '용도'나 자본의 가치로 환원할 수 없는 '용도'는 이들에게 용납될 수 없었다. 프랑스 철학자 미셸 푸코(Michel Foucault, 1926-1984)의 <광기(狂氣)의 역사(1961)>에 의하면, 중세까지만 해도 나름 경외의 대상이었던 '미치광이'들은 17~18세기에 이르러 집단적으로 사회에서 추방되기 시작했다. 부랑자, 거지, 실업자등도 닥치는 대로 대낮에 수용소로 보내졌다. 근대 국가의 탄생과 함께, 이성적인 잣대로 재단될 수 없는 모든 것들은 사라져야 했다. 이제 그 폭력적인 '재단'을 자본이 하고 있다. 투자 대비 효율성이 떨어지면 당장 상품성이 있는 용도를 찾아내야만 하는 것이다. 그들에게 방치된 노들섬은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하지만 노들섬은 방치되었던 것이 아니다. 오히려 특정한 시대 특정한 정권의 '포획'에 자기 자신만의 방식으로 저항하며,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고 또 다른 가능성을 고민하게 하는 아주 '유용'한 공간이다.

이제 '효용성·효율성'의 굴레를 내려놔보자. '방치'된 노들섬은 그 가능성만으로도 참 아름답다.

<홍익대학교 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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