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들 괴로움을 원할까. 원하지 않는다면서 용케 괴로울 상황을 잘도 만들어 괴로워 죽겠다고 울상 짓는 것이 중생들이 가진 재주라면 재주다.

극락은 괴로움의 반대말이 아니다. 일이 뜻대로 되어 함박웃음을 짓는다고 그것이 극락은 아니다. 극락이란 불행감과 행복감 그 둘을 초월해 있는 마음상태다. 그렇다고 울지도 웃지도 않는 표정이거나, 감정에 무던한 것도 아니다. 능히 울고 웃되 아무것도 붙들지 않고 바로 보내는 힘에서 나오는 여여한 마음상태다.

극락이란 어디를 얼마만큼 가야 있거나 죽어서 가는 어디쯤이 아니다. 지금 이순간 고와 낙을 초월해 사는 삶의 상태다. 초월이란 괴롭고 즐거움을 넘어서, 경계와는 아무런 관련도 핑계도 없이 여여함이 유지됨을 말한다. 어떤 조건이 갖춰지면 행복해질 거라고 기다리거나 그것에 기대지 않고 조건에 무관하게 잘 지내는 것이다.

이러면 꼭 중간에 끼어들어 이렇게 따지는 사람들이 있다. 그게 인생 아닌가요? 괴로움과 즐거움, 못살겠다가도 좋을때도 있고 그게 정상이죠. 이 마음이 사실 가장 불행하고 위험한 일이다. '인생 다 그렇지뭐 별 것 있겠어' 하고 속삭이며 무명에 길들여지고 벗어나려고 시도조차 않는 것이 중생의 특징이자 필요조건이다.

그 마음 때문에 파란고해 불타는 집에서 죽네 사네 외치면서도 영생토록 그 상황을 반복하며 윤회하게 된다. 어둠을 어둠으로 인식할 수 있어야 극락, 해탈, 자유, 광명의 길로 향하려는 에너지가 형성되어 결국 깨달음의 기연을 만날 수 있게 된다.

견성하지 못하면 결국 극락을 모른다. 자성을 오득하지 못하면 자성반조를 할 수가 없다. 자성이 극락이다! 가고 말 것도 없다. 온 우주가 나뿐이니, 상대가 없으니 괴롭힐 자도 없고 괴롭힘을 받는 자도 없어 즉시 극락이다. 괴롭히는 것과 괴로움을 느끼는 자가 하나임을 비추면 일체고액이 일시에 멸도 된다. 자성을 비춤이 극락이다. 자성을 오득하지 못하면 놓은 척하는 고된 수행만 한다.

일상에서 극락을 유지하려면 이름표 떼기를 잘해야 한다. 우리는 어떤 대상, 어떤 조건이나 상황에 이것은 좋은 것, 저것은 불행한 것이라고 이름붙이기를 잘도 한다.

죽음, 병, 사고, 불합격, 고독, 기타 등등에 불행, 고통, 잘못된 일이라고 재빨리 이름을 붙이고는 힘들어 죽겠다고 목 놓아 운다.

어떤 몇몇 안되는 상황들에는 좋은 일이라고 이름 붙여 놓고 실실거리며 붕 떠있다. 이름만 붙이지 않으면, 세상 어디에도 규정된 행복과 규정된 불행은 없다! 어떤 행동이나 어떤 상황이나 일어난 일 자체가 고통이거나 행복이 아니라 꼭 반전이 있단 말이다.

어떤 시인이 읊었듯, 꽃이라 이름붙이지 않으면 그냥 하나의 몸짓에 불과하다. 일체를 하나의 몸짓으로만 보고 오락가락 하지 않는 것이 지혜로움이며 극락이다. 우리가 만나는 일체의 인연이나 현상은 좋고 나쁜 것이 아니라 중립임을 직관해야 초월이 가능해진다.

그게 다 세상사는 재미죠. 안그러면 무슨 재미로 살아요~하며 또 끼어든다. 그러고는 몇일 후에 죽을 상을 하고 다시 나타난다.

그러니 이를 장차 어찌할꼬!

/송도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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