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새해 첫 일출 관자재보살은 깨어있기 때문에 육근을 자유자재 할 수 있는 사람이다. 닭은 꼬끼요하고 우는 것이 아니라 꼭 깨요라고 잠든 우리를 깨운다.
▲ 김종천 원로교무
보는 삶 아닌 보이는 것 좇아
구체적 실천 없다면 '회칠한 무덤'
깨어 있어야 자유자재한 관자재보살


도대체 관자재보살이 누구인가. 매일 또는 법회 때마다 누구인지도 모르고 그 보살의 명호를 부른다.
어느 집 부인인지 아니면 건넛마을 김 서방의 다른 이름인지, 경문의 주인공이 누구인지도 모르고 메아리 없는 소리를 그냥 반야심경에 나오니까 외울 뿐이다. 우리가 하는 일이 항상 이렇다.

관자재보살은 바로 당신. "나라니요? 나는 여기 있잖아요?" 하지만 그것은 당신이 마스크를 쓰고 연기하고 있을 뿐, 탈을 벗고 있는 그대로 보여줘야 하는데, 실력이 따라주지 않기 때문에 꼭두각시의 얼굴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그 보살은 여자인가? 남자인가? 그것은 생각하기 나름이다. 물론 산스크리트는 명사에 성이 있어서 남성 명사인지 여성 명사인지가 분명하지만, 반야심경에서 그런 것을 따지는 것은 문제의 본질을 회피하는 것이다. 남성 쇼비니즘 사회에서 부드러운 자비를 표현하려다보니 여성의 모양을 차용하게 된 것일 뿐이다.

신앙의 대상이 된 '아발로끼떼쉬바라'를 구마라습은 관음 또는 관세음으로, 축법호는 광세음(光世音)으로 현장은 관자재로 번역했다. 글자의 뜻을 길게 풀면 '널리 빠짐없이 보는 것에 아주 뛰어난 자유자재로운 사람'이란 뜻이다. 한마디로는 '자유인'이다.

보고 생각하는 것에 자유자재 할 수 있는 사람은 만사가 자유롭다. 관(觀)이란 글자는 올빼미의 상형에 본다는 '견'자와 합쳐서, 밤에도 대낮처럼 보듯이 어떤 장애물 없이 사물과 사건의 본질을 깊이 꿰뚫어 볼 수 있는 사람이다. 육근문에 어느 것 하나가 소중하지 않은 것이 있으랴마는, 본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하다.

우리는 지금까지 무엇을 보고 사는 것 같지만, 기실은 보는 것이 아니라 보이는 것을 좇아가는 삶이었다. 그냥 눈에 비춰지는 대로 판단하고 적당히 지나가는 타인의 눈에 의존한 생활이었다.

평수가 적은 아파트에 산다고 그 사람을 그 크기로 판단하고, 직책이 높은 자리에 있다고 그의 인간됨까지 고상한 줄 안다.

슬퍼하는 사람의 벗이 보살일진대 우리는 보살과는 거리가 멀다. 아무리 좋은 교리로 무장을 하고 있더라도 구체적인 현장에서의 실천이 없다면 그 것은 '회칠한 무덤'일 뿐이다.

관(觀)은 '그냥 보는 것(looking)'이 아닌 '꿰뚫어 보는 것(seeing)', 모순된 나의 내면세계와 삶의 터전이 회화와 소통을 통하여 조화를 찾는 일이다. 잘 보는 것이 힘이다.

그 보살은 '자유의 여신'인 것 같은데 어떤 자유가 있을 수 있나 보자.

육체로부터의 자유

우리는 고기 덩어리인 육신을 가지고 살지만 프로그램화 된 몸의 시장 변화와 계약 기간이 만료되면 반납해야 한다. 아무리 성능이 좋은 '고급차'를 몰고 다니더라도 그냥 운전수로서의 역할로 끝날 뿐이지 내가 그 차 자체가 될 수는 없다. 그러므로 차를 소유하고 있을 때 온전한 생각을 갖고 그 차를 이용하고 즐기면서 그것을 활용해야 순리다. 괴로움과 즐거움에도 말려들지 않고 관(觀)을 해야지, 일천 강에 비춰진 달이 참 달인 줄 알아서는 '자동차' 사고가 나기 마련이다. 육체로 인하여 판단이 흐려져서는 안 된다.

사물과 일로부터의 자유

일이 있을 경우에는 사물과 사건에 몰입하되, 없을 때는 '내' 일을 '남의 일'처럼 볼 줄도 알아야 한다. 보는 것 없이 볼 줄 알아야 관자재보살이 된다. 육안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심안으로 제3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천성대로 살면 스트레스를 받을 일이 없을 것인데 감추고 눈치를 보며 살기 때문에 힘들어진다. 훈련이란 개처럼 명령복종에 길들여지는 과정이 아니다. 그것은 살기에 불편한 나의 천성을 바꾸는 것이라기보다는 요령 있게 운전하는 기술을 배우는 것이다.
▲ 천수천안 관자재보살은 자비로 중생의 괴로움을 구제하고 왕생극락의 길로 인도한다.


자유를 위한 자유(해탈한 사람의 심경)

참 자유란 구속된 무엇으로부터의 자유도 아니고 어떤 것을 이루기 위한 자유도 아니다. 보는 주체가 없기 때문에 자유롭다. 그야말로 주착하는 바 없이 마음을 내는 사람이 관자재보살이다. 꼭하고 싶은 것이 있으면 그 때 그 때 해야 한다. '그래 알았어, 나중에 할께'하면 그 빈틈을 헤집고 에고(ego)가 들어오기 마련이다. 하루를 살아보면 다 살아본 것인데도 무슨 미련이 있어서 그런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은 "내일은 또 다른 날일 거야"라고 헛소리를 한다.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 '율리시즈'는 1904년 6월16일 그 날 하루 일어난 이야기를 수다스럽게 늘어놓고 있는 것인데, 오늘이 바로 그 날이다. 우리의 일생은 오늘 하루에 오버랩 되어있다.

마음이란 도대체가 없는 것인데도 불구하고 혹시 있다면 작용할 때만 있는 것인데도(性在作用), '처방전'의 '약'을 먹은 교무들은 '마음공부'하라고 성화를 댄다. 마음공부를 안해야 자유로운 관자재보살이 될 수 있다. 왜냐하면 '마음의 자유'가 아니라 액자에 갇혀버리고 약물로부터 중독된 그런 '마음으로부터의 자유'이기 때문이다. 짝이 없어 허전한 듯, 속옷에 고무줄이 끊어진 듯, 무엇인가 잊어버린 듯, 아쉬운 듯해야 극락이 엿보인다. 그 보살은 명품으로 몸을 휘감은 여자가 아니다. 그러면 자유로울 수가 없다.

'저 것이 내 것이 되었으면' 또는 '내 뜻대로 해주었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있다면 이미 나는 그것에 구속된 것, 즉 내 생각의 노예가 되어버린 것이다. 자유란 수시 수처에 당당하다. 자유인 관자재보살은 세상이 무슨 소리를 해도 눈썹도 까딱하지 않고 가는 사람이다. 그러려면 항상 깨어 있어야만 한다.

올해는 정유년 닭띠의 해다. 닭은 '꼬끼요!'하고 우는 것이 아니라, '꼭, 깨요!'라고 잠든 우리를 흔든다. 관자재보살은 깨어있기(惺惺: 깨요! 깨요!) 때문에 육근을 자유자재할 수 있는 사람이다.

올해는 우리 모두 관자재보살의 마음 바탕까지는 몰라도, 몸이라도 비슷하게 연기를 해보자. 하늘이 만든 기획과 연출은 내 몫이 아니더라도, '극장'에 던져져 맡겨진 배역의 '연기'는 다른 누구도 아닌 내가 해야 하는 것이니까 말이다. 각자 혀를 깨물고 최선을 다해보자. 독주를 잘해야 협주도 잘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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