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불교개혁의 두 번째 내용은 법보의 현대화이다. 원불교의 핵심 법보는 정산종사가 본경이라고 밝힌 원경(元經) <정전>과 통경(通經) <대종경>이다. 이 외에도 교서로서 이미 편정되었거나 향후 편정될 법설들은 모두 경전으로 보고 있다.

깨달음의 법문은 다름 아닌 절대 진리로서 법신불의 소식을 설한 것이다. 깨달은 모든 성현은 법신불이 중생구제를 위해 보낸 사자와 다름이 없다.

불타는 "나는 옛 길의 발견자이다"라고 설한다. 공자는 "술이부작(述而不作)한다"고 한다. 예수 또한 "율법을 폐하려고 온 것이 아니라 완전케 하려고 왔다"고 한다. 이처럼 그 길은 누구에게나 열려 있으며, 그렇기 때문에 노력하여 깨달은 자의 언설에 진리적 권위를 부여하는 것이다.

그런데 불교의 전통을 계승하는 원불교의 독자적인 경전들을 과연 경전으로 볼 수 있는가 하는 문제가 제기되기도 한다.

이러한 시각은 대승불교의 불전이 불타의 직접적인 설법이 아닌 위경(僞經, 가짜 경전)이라고 본 것에서 출발한다. 〈유마경〉 〈법화경〉 〈화엄경〉을 비롯한 모든 대승경전은 물론 중국에서 찬술된 유교적인 〈부모은중경〉, 도교적인 〈시왕경〉 등이 역사적 불타가 설한 것인가 하는 의심을 갖게 된 것이다. 불타의 교설은 〈아함경〉(남방불교는 〈니카야〉)에 거의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 외의 경전은 무엇인가.

이곳이 바로 불교가 다른 종교와 구별되는 지점이다. 진리는 불가득 불가설 즉, 누구에게도 소유될 수 없으며, 다 설할 수도 없다. 불타에게 가탁된 대승경전은 예비불타인 인간의 성불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경의 권위를 평준화시켰다고 할 수 있다. 대승불교 운동 과정에서 탄생한 경전들은 수많은 불타가 열반 이후에도 다녀갔음을 보여준다. 위경은 시대와 인간의 근기에 따라 법을 설한 시기상응의 경전인 동시 새로운 경전 출현이 늘 예비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절대적 진리마저도 집착해서는 안 된다고 가르치는 반야공사상은 불타의 49년 설법도 오히려 모자라며, 그 말씀 또한 진리를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깨달음의 길을 보여주는 것에 불과하다고 가르친다. 불타의 열반법문인 '자등명 법등명'에 입각하여 용수는 〈대지도론〉에서 "법에 의지하되 사람에 의지해서는 안 된다"고 명쾌하게 언급한다.

그럼에도 전통적으로 경률론 삼장을 대장경이라고 부르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불법을 밝힌 모든 언설은 문자반야로써 최고의 가르침에 속한다.

이처럼 언어방편을 중시하면서도 동시에 매이지도 않는 이유는 가장 이상적인 삶의 목표가 내적 깨달음을 통해 자유롭고 주체적인 부처의 삶을 사는 것에 있기 때문이다. 방대한 경전은 다 볼 수가 없으며 보통 사람은 엄두도 낼 수 없다.

따라서 '간단한 교리와 편리한 방법'으로 행복한 낙원에 인도하는 것이야말로 대자대비의 발로이다. 〈정전〉은 성불제중의 대차대조표이자 불국토 건설의 도면이며, 〈대종경〉은 법신불 진리를 삶으로써 해석해 보여준 성자의 진실한 모습이자 후인들의 표본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 시대에는 〈정전〉을 교과서로 삼아 각양각색의 '대종경'을 생산해 내는 것에 법보 개혁의 궁극적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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