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류응주 교무/법무실
공중을 위한 삶, 영생을 위한 출가
기간제 전무출신, 인생의 이모작 전환점


佛言- 除鬚髮하고 爲沙門하야 受道法者는 去世資財하고 乞求取足하며 日中一食하고 樹下一宿하며 愼不再矣어다 使人愚蔽者는 愛與欲也니라.

"부처님 말씀하시되 불법을 배워 도를 지키는 이는 세상의 향락을 버리고 빈한에 안분하며 도를 이루기 위하여는 비록 천만 고통이 있다 할지라도 다시 욕심을 부리지 말라. 사람으로 하여금 어리석고 어둡게 하는 것은 다만 애착과 욕심이니라."

〈사십이장경〉 3장의 한문 원문을 해석하면 다음과 같다. "출가하여 머리를 깎은 사람을 사문이라 한다. 사문은 도와 법을 받아 세상의 재물을 버리고 구걸하여 취한 것에 만족하며, 하루 중에 한 끼만 식사를 하며 나무 밑에서는 하룻밤만 자며 두 번 자지 말지어다. 사람으로 하여금 어리석고 가리는 것은 애착과 더불어 욕심이니라."

이 장의 말씀은 부처님 당시 수행자들이 지켜야 할 생활의 규범이었다. 세속에서 사는 일반 대중과는 달리 성불제중의 서원을 이루기 위해 출가한 수행자는 욕심을 버리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가이드라인을 제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지금도 태국, 미안마 등 남방불교에서는 걸식으로 하루에 정오 이전 한 끼 식사만 하는 수행자들을 볼 때 부처님 당시의 제도가 현재까지 지켜지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불교에서는 머리카락을 무명초(無明草)라고 하며 '세속적 욕망의 상징'으로 본다. 일반인들은 머리카락 손질에 많은 시간과 돈을 투자하며 살고 있다. 그래서 수행자는 세속적 욕망의 상징인 머리카락을 깎음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이 수행자라는 것을 알리고, 일반인과는 다른 정갈한 모습을 보인다. 또한, 머리 손질에 들이는 시간을 줄여 공부하는 시간을 위해 머리를 깎는다.

도와 법을 받은 사람 즉, 수행자가 되기로 서원을 세운사람은 세속의 재물을 버리고 재산을 모으지 않는다. 그렇다면 수행자는 의식주를 어떻게 할 것인가? 부처님께서는 평소 하루에 딱 한번 오전에만 식사(日中一食)를 하셨기 때문에 훗날 제자들도 그 뜻을 받들어 오전 중 사시(巳時, 오전 9시∼11시)에 한 끼의 식사를 하도록 하였다.

오전 걸식을 제도화 한 것은 무더운 인도의 기후와도 관련이 있으며 걸식은 아만심을 놓고 겸손을 갖게 하는 효과가 있다.

또한 칠가식(七家食)을 통해서는 좋고 낮은 것을 선별하는 마음을 버리게 하였으며, 하루 두 끼 이상을 먹게 되면 시주자에게 누를 많이 끼치게 될 뿐만 아니라 자신의 복도 감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배불리 먹음으로 인해서 육체의 즐거움을 위해 먹는 것을 경계하며 절제하고 금욕하는 자세를 배우게 했다. 한나무 아래에서 하루 내지 삼일 이상은 머물지 못하게 하는 것 또한, 좋아하고 편안한 것에 끌리고 애착하는 것을 경계하는 가르침이다.

옷도 분소의(糞掃衣: 사람들이 쓰다가 더 이상 쓸 수 없어 버린 옷. 이 옷은 똥을 닦는 헝겊과 같다는 의미)를 입도록 한 것은 수행자의 탐심을 여의기 위한 것으로, 도를 닦는 이가 검소함을 갖도록 하기 때문이다.

세상을 살다보면 온갖 번뇌로 고통스러운 경험을 하지 않을 수 없다. 끝이 없고 생각대로 되지 않은 세상사 속에 살다보면 출가에 대한 생각을 한번쯤 해 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러나 그동안 살아왔던 인연들과의 관계와 세속에 대한 미련을 쉽게 버리지 못해 생각만으로 끝내고 말 것이다.

교단에서는 이런 상황에 있는 분들에게 기간제 전무출신이라는 제도를 통해 늦은 나이에도 출가를 통해 자신의 새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길을 열어 시행하고 있다. 현재 몇 명의 기간제 전무출신이 소정의 교육을 마치고 일터에서 헌신적으로 근무하고 있다.

그동안 자신과 가족들만을 위해 살아왔던 삶, 오직 눈앞에 펼쳐진 명예와 이익을 추구하며 살아왔던 삶을 되돌아보며 한번쯤 이런 모든 얽매임을 벗어나 '오직 공중을 위한 삶, 영생을 준비하기 위한 구도의 삶을 살기 위해 출가를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하는 생각을 해 본 사람들이라면 기간제 전무출신의 길이 인생의 이모작을 하기위한 전환점이 될 것이다.

'비닐하우스의 성자'로 알려진 원불교 3대 종법사 대산종사를 떠올려 본다. 철없던 간사시절 대산종사가 왕궁 조실에 머무를 때 조실안의 물건들은 어느 것 하나 돈을 들여 샀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다. 반듯한 것 하나없이 모두 손때가 묻은 것들이었다.

집은 묘지관리를 위해 창고로 사용하던 곳을 개수했던 곳이고, 책꽂이와 물품 수납장은 나무로 만든 사과궤짝에 창호지를 바른 것이었다. 하루 세끼 식사를 하던 식탁은 영모묘원에 시신을 매장하고 버려진 관으로 만든 것이었다. 손님들이 앉는 장대의자도 또한 시신을 담았던 관으로 만든 것이었다. 말년에는 입기 편리한 가운만 입었을 뿐 다른 의복을 입은 모습을 뵌 적이 없으며, 신발도 언제부터 신었을지 모를 오래되고 큰 신발만 사용했다.

물질 풍요시대를 살아가는 나를 보며 그 소박함이 그리워지는 요즘,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고 발버둥치며 살고 있지는 않은지 돌아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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