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성가 76장 천 가지 만 잎사귀는 성리 공부의 노래다. 작사가 중산 정광훈 교무는 누구보다 영육쌍전 이사병행의 정신으로 생활했으며 성리에 표준한 삶을 살았다.
기러기 떼처럼 줄지어 일원 회상에 불연 맺어
무량한 칠보 보시도 상없는 덕 닦음만은 못하다


76장) 천 가지 만 잎사귀(성리의 노래)
정광훈 작사 / 정회갑 작곡

1. 천 가지 만 잎사귀 얼기설기 얽혔으나
파헤쳐 들어가면 그 근본은 뿌리 하나
우주의 삼라만상 여기저기 벌였으나
간추려 들어가면 영명하온 기운 하나

2. 이 마음 모든 분별 가지가지 일어나나
사무쳐 들어가면 본래 맑은 성품 하나
아 아 그 뿌리 그 기운 그 성품을
밝히어 북돋우세 바로 찾아 활용하세.

대종사님 따라다니는 기러기 떼

〈성가〉 76장 성리의 노래는 중산(中山) 정광훈 교무의 작시이다. 나주 정씨 일가가 소태산 대종사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은 중산의 모친 안타원 김동수로부터 시작된다. 그녀는 길룡리에서 대종사와 같은 해에 태어났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하여 일찍이 한글도 익혔고 한문도 제법 읽는 편이었다. 그래서 글을 읽지 못하는 마을 부녀자들에게 고대소설을 읽어주는 등의 여걸다운 기품과 너른 아량이 있었다. 대종사는 김동수의 인물됨을 알고 있었기에 가까운 인척 관계의 사타원 이원화를 보내서 입교시킨다.

이러한 모친의 인연으로 정씨 일가는 일원가족이 된다. 부친 충산(忠山) 정일지로부터 누이 보타원 정나선, 덕타원 정양선, 남동생 백산 정학현, 여동생 하타원 정양진 등 전 가족이 소태산 대종사의 제자가 되고 중산과 더불어 충산, 덕타원, 하타원도 전무출신하게 된다. 숙부 정익수의 아들 균산 정자선과 숙부 정봉수의 딸 죽타원 정경호도 전무출신하게 되므로 정씨 일족은 일원가족이 된다. 중산 정광훈 교무와 그의 일족들은 〈대종경〉 인도품 19장의 말씀처럼 대종사를 따라 다니는 기러기 떼였던 것이다.

중산 정광훈 교무는 영광에서 원기15년(1930) 모친 김동수의 인도로 입교하고 원기20년(1935)에 출가해 이후로 교단의 중책을 두루 역임하면서 남다른 정열로 교단의 창립 발전에 헌신한다. 〈예전〉 편찬, 개교 반백년 기념사업 추진, 서울회관 건립, 하섬 수양원 창설과 개척, 원광 중·고등학교의 위기 수습과 발전 등에 그는 남다른 노력으로 헌신 봉공한다.

교단이 위기에 봉착할 때마다 그는 앞장서서 위기 극복에 노력했고 항상 스스로 못났다고 겸손해 하면서도 교단의 발전을 위해서는 자신을 아낌없이 헌신했다. 항상 청년 같은 패기와 젊음이 넘쳤고, 8·15와 6·25의 어려운 시기에도 총부를 지키기에 앞장섰으며, 교단의 행정체제 확립에도 공헌하였으며, 남자 정화단 창립에도 주역을 담당한다.

본래 맑은 성품, 바로 찾아 활용하세

중산 정광훈은 처음 출가하여 대종사의 명에 따라 전주 제사공장을 거쳐, 보화당, 총부 사무실, 산업부, 서울교당, 영산, 수계농원 등 가라는 대로 가서 사심 없이 일한다. 이것이 바로 대종사에게 훈련받은 심력(心力)으로, 그 스스로 당시를 "갈 지(之) 자 걸음을 걸었다"고 회상하며 교단이 필요한 일터라면 어디든지 가서 일했던 것이다.

중산 정광훈 교무는 누구보다도 영육쌍전 이사병행의 표어정신을 잘 실천한 사람으로 생활 속에서 불법을 실현한 인물이다. 그는 교단의 소방수요 구원투수로서 사건이 발발할 때마다 앞장서서 막아낸 강력한 실천가요 행동가였다.

그의 이런 헌신성과 생활 속에서 불법을 닦는 수행 태도는 성리에 바탕한 것이었다. 이런 점에서 〈성가〉 76장 성리의 노래는 그의 심중을 나타내고 있다 할 것이다. 비록 생활 속에서 불법을 주장하지만 안으로 진리를 찾으려는 뼈저린 각고의 수행을 쉬지 않았던 것이다. 중산은 항상 '참'을 노래하고 주장했으며, 참은 선(禪)이며 구경에 가서는 '일원상 진리의 핵'이라 하였다. 중산에게 '참'은 바로 일원상의 진리이며 성리의 노래였던 것이다.

중산은 안으로 진리를 추구하는 마음이 강렬했기 때문에 교단의 어려운 고비마다 누구도 맡기 싫어하는 책임을 맡을 수 있었던 것이며, 일은 앞장서서 하고 공은 뒤로 했던 것이다. 이는 바로 성리에 근거한 공부심이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중산은 〈성가〉 76장 성리의 노래에서 천 가지 만 잎사귀의 근본도 파헤쳐 들어가면 그 뿌리 하나이듯이, 삼라만상도 여기저기 벌려있으나 간추려 들어가면 영명한 기운 하나이며, 가지가지의 모든 분별도 본래는 그 성품 하나라는 깨달음의 노래를 불렀다. 그리고 그 기운 그 성품을 밝히고 북돋아서 바로 찾아 활용하자는 것이며, 또한 그 성품자리에 계합하는 데에만 그칠 것이 아니라 활용하는 데까지 미치자는 것이다.

대종사는 〈정전〉 정기훈련법에서 '성리는 우주 만유의 본래 이치와 우리의 자성 원리를 해결하여 알자 함'이라 하며 또한 만법귀일 일귀하처(萬法歸一 一歸何處)의 의두를 연마하게 했다.(〈대종경〉성리품 17장)

우리가 눈앞의 소나무를 볼 때 소나무를 보는 그 마음을 돌이켜 비추어 보면, 반조(返照)하는 그 마음당체에는 일체의 분별이 없으면서 역력히 아는 자리이다. 만일 이렇게 공적(空寂)하면서도 역력한 자리(靈知)가 아니라면 눈앞의 소나무가 그렇게 보는 대로 두렷이 드러날 수 없다. 소나무가 훤히 드러나는 근본 자리가 우주만유의 본래 이치이며 공적영지의 자성이 드러나는 원리인 것이다.

소나무는 마음과 무관하게 눈앞에 존재하는 객관적인 사물이 아니라 마음이 없다면 존재할 수 없는 자리이다. 소나무를 보는 자리를 반조해 보면 그 자리는 하나이며 그 하나가 그대로 소나무로 드러나 있는 역력함이다. 소나무라는 만법이 본래 역력한 하나이며 하나가 만법으로 역력히 드러나 있는 것이다. 특정 시공간에서 어떤 대상을 알아차리기 전에 이미 공적영지한 '깨어있음'이 본래 있는 것으로, 경계에 매몰되는 이분법적인 모든 마음을 내려놓으면 본래 깨어있음 자체가 눈앞에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 '깨어있음'에는 일체의 흔적이 없으면서 지혜와 덕성이 구족해 있는 자리이다. 중산은 바로 이러한 성품에 바탕해서 온갖 어려운 책임에 처해도 흔들림 없이 매몰되지 않고 지혜롭게 용단 있는 실천을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중산 정광훈 교무가 또 다른 노래인 〈성가〉 78장 무상의 노래를 지었던 것도, 경계 속에서 그의 심중이 그대로 우러났기 때문이며, '나마저 놓아버린 상(相)없는 세계'라는 성리의 세계를 체득했기 때문이다.

그는 교단의 소방수로 온갖 책임을 다하면서도 티끌 만한 상이라도 머물지 않는 본래 맑은 성품 하나를 놓치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모든 선업 힘을 다해 닦아 놓고도 티끌만한 상이라도 맘에 머물면 한 점 티가 맑은 동자(瞳子) 어지럽히듯 도리어 삼독의 씨 되기 쉬운 것'이라 자신을 경책했던 공부인이었다. 보은불공을 하고서 그 했다는 흔적에 사로잡히면 그것이 한 점 티가 되어 눈동자를 어지럽히는 꼴이 된다는 염려이다. 그러므로 "무량한 칠보 보시도 상 없는 덕 닦음만은 못하다"는 경전의 가르침처럼 공심(公心)을 행하고 상을 놓아야하며, 그 상을 놓는다는 "그 법마저도 마지막엔 놓으라"는 철저히 성리에 바탕한 공부심의 실현이었다.

이처럼 〈성가〉 76장 성리의 노래와 〈성가〉 78장 무상의 노래는 바로 그의 체험이며 함께 공부하고 싶은 감상담이다. 〈성가〉 76장 성리의 노래 가사에서의 기운과 성품의 관계는 상호적이다. 성품의 작용이 마음이며 마음 운영의 바탕이 성품이라 할 것이다. 또한 마음을 힘의 측면에서 보면 기운이고 기운의 분별적 작용을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원음산책

〈성가〉 76장 성리의 노래의 반주를 듣노라면 친한 동무와 발걸음을 맞추어 경쾌히 걷는 기분이 든다. 어린 시절 소풍가는 기대에 찬 마음처럼, 들뜨고 기쁜 마음으로 신나게 소풍가는 마음이다. 악보에 장엄하고 법열에 넘치게 부르도록 하고 있는데, 법열은 경쾌함으로 뻗어가며 장엄은 경쾌함의 바탕이 되고 있다. 표면적으론 경쾌하나 바닥에 흐르는 저류(底流)는 묵직하게 깔려 있는 듯하다. 소풍가는 경쾌함처럼 소풍가는 기대와 희망 그리고 그 곳에서 즐길 기쁨이 함께 하는 기분이 든다.

〈성가〉 76장은 원불교 성가의 트로트로 경쾌하게 꺾는 리듬이 법열로 승화되는 듯하다. 〈성가〉 76장 성리의 노래는 정회갑 작곡으로 원기52년(1967) 정화사에 의해 〈성가〉로 제정된다.
▲ 방길튼 교무/나주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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