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태산 대종사 전생이야기
회상 여실 준비로 여러 번 몸 나투셔

▲ 천년 고찰 양주 천보산 회암사지. 나옹대사가 중수해 승려 3천명을 수용한 전국사찰이었다.
전생 이야기라면 사특하고 미신으로 여기는 식자층이 많다. 이 또한 무지의 소산이요 단생이 전부인 줄만 아는 하루살이 소견에 다름 아니다. 인간완성의 대드라마 '부처되는 길'의 관점에서 볼 때 전생은 다생 겁래의 한 부분으로, 진급과 강급의 묵은 일기장이요 희망찬 미래를 향한 시발점이라 볼 수 있다. 이를 확실히 인식함으로 해서 인간완성을 향해 견고한 목표를 세울 수 있고 더 이상 강급의 길로 떨어지지 않고 진급을 향한 행보가 당당해지게 된다. 전생은 진급을 향한 발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우리는 다만 진급하기 위해 이생에 온다. 석가모니 부처님은 500생을, 1불 비파시불은 1,500생이나 몸을 받아 마침내 부처를 이루었다.

정산종사 말씀하셨다. "대종사께서 이 회상 여실 준비로 이 땅에 여러 번 나오셨다. 나옹대사·진묵대사·영원조사는 물론, 드러나지 않게도 여러 번 나시어, 미리 인연을 이 땅에 심어셨다." (이공전, 〈범범록〉 시탕일기)
▲ 소태산 대종사.

통일신라시대 영원조사

대종사 원기15년(1930) 8박 9일간 금강산 여행을 하였다. 5월29일 등반 첫날 장안사를 경유, 마의태자 대궐터를 지나 영원조사(靈源祖師)가 수도하던 영원암을 찾았다. 신라시대 영원조사가 창건한 영원암은 금강산 일원에서 가장 맑고 고요한 수도처로 이름 높았다. 영원이 공부한 흔적은 10년간 매일 지장보살께 예배하노라 두 무릎과 두 손으로 인해 패인 배석대(拜石臺)가 이를 증명한다. 종사주 귀로에 시 한 수 읊었다.(〈월말통신〉 27호)

영원암 구경 잘하고 다 거두어 가노라 步拾靈源景
이제 영원암 뼈다귀만 남았구나. 靈源皆骨餘

영원조사는 〈한국불교대사전〉에도 수록되어 있지 않다. 불교 민담에 여러 건 전한다. 동래 범어사에 명학(明學)이란 중이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백여 명의 상좌를 거느렸다. 명학이 청룡 꿈을 꾸고 상좌로 삼은 영원은 금강산 영원동에 암자를 짓고 십년간 정진에 힘썼다. 영원이 선정 중에 은사 명학이 죽게 된 것을 알았다. 영원은 범어사로 돌아가 구렁이 몸을 받은 은사를 천도시키고자 신실한 소작인 전씨 집에 다시 태어나게 했다. 아이가 7세가 되자 영원암에 데리고 와 참선법을 가르쳤다. 방편을 써서 문창호지에 바늘구멍을 하나 뚫어 놓고 "이 구멍으로 황소가 들어올 터이니 놓치지 말고 뿔을 꽉 잡으라. 일심으로 황소만 생각하라" 공부시켰다. 어느 날 7세 동자가 외쳤다. "황소가 바늘구멍으로 막 들어옵니다"

7세 동자가 숙명통을 했다. "스님이 전생의 내 상좌였구려! 이제는 스님이 내 스승이 되고, 내가 스님의 상좌가 되었네요." "그래, 이것이 인과니라." 뒤바꿔진 스승과 상좌가 전생 일을 얘기하며 영원암에서 오래도록 수도정진 하였다.
▲ 나옹대사.
고려말기 나옹대사

나옹대사(懶翁大師)의 성씨는 아(牙)씨, 고려 말기 공민왕의 왕사(王師)이다. 나옹은 조선개국 태조의 왕사인 무학대사의 스승이다. 스무살 때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 양주 천보산 회암사(檜巖寺)에서 4년간 좌선에 몰두, 일본 화상 석옹(石翁)에게 인가받았다. 28세에 원나라에 유학, 연경의 고려사찰 법원사에서 인도 승려 지공(指空)에게 선기를 인정받았다.

10년만에 귀국, 회암사를 중창, 3,000여 승려를 수용하는 전국사찰의 대본산을 만들었다. 57세(우왕2)에 문수회를 열어 법풍을 떨치자, 사람들이 일손을 놓고나와 회암사 가는 길이 인파로 넘쳤다. 벼슬아치들이 그를 모함, 경남 밀양 영원사로 유배 가던중 여주 신륵사에서 열반했다. 진작부터 나옹은 주위 인연들을 툴툴 떨치고 전국산천을 훨훨 다니며 수도하길 즐겨했다. 팔도강산 도처에 나옹의 토굴 아닌 곳이 없었다. 그는 또 국민가곡이라 해도 좋을 법문을 남겼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靑山見我 無言以生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蒼空見我 無塵以生
성냄도 벗어 놓고 탐욕도 벗어 놓고   解脫嗔怒 解脫貪慾
산 같이 물 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如山如水 生涯以去

▲ 진묵대사.
조선중기 진묵대사

석두거사 봉래정사에 있을 때 이야기다. 완주 봉서사에 다녀 온 한 중이 진묵대사 부도가 희어져 가더라고 떠벌렸다. 진묵이 열반 전에 내 부도가 희어지면 세상에 다시 온다는 유언을 남겼다는 것이다.

"자네가 진묵스님이 다시 오면 알아보겠는가?" "아, 보면 알 테지요."
"내가 진묵이라면 어쩔껴?" 중이 뻥해서 석두거사를 쳐다본다. 석두거사 껄껄 웃었다. (이경순, 대종사 추모담; 〈항타원문집〉)

진묵대사는 조선 중기 명종·선조·광해군·인조 연간에 걸쳐 71년간 살았다. 그는 전주를 중심으로 호남일대에 편력하였다. 신료라는 것들은 동서(東西) 붕당을 지어 밤낮 권력다툼을 하더니 마침내 피비린내 나는 옥사를 벌렸다. 정여립이 대동계(大同契)를 하여 역모한다고 모함, 그에 연루된 전라도 선비 1,000여명을 죽이고 서인이 득세하였다. 자기 일신의 왕권욕에 사로잡힌 무능한 임금을 부추겨 기축옥사에 이어 결국 왜병을 끌어들여 임진왜란과 정유재란까지 국난(國難)이 터지고 말았다. 진묵은 갈피잡지 못하는 민중 속에서 민심을 어루만지며 천심을 잃지 않도록 그 중심역할을 하였다. 산중에 피신해 있는 불법에 대해 시대화·생활화·대중화되어야 한다고 역설, 절집에 엉터리 중만 우글거린다며 갓 쓴 불상을 조성하는가 하면, 진짜 중은 시중으로 내려가야 한다(眞僧下山 假僧入山)고 외쳤다.

석두거사, 월명암의 송규를 불러 새 회상 창립인연을 찾아가라고 명했다. "네 가고 싶은 대로 가거라. 전주는 돌아보지 말라" 송규가 전주를 향해 한참 가다가 그 근방에 와서 우회하여 가는 길은 모악산 대원사와 만덕산 미륵사였다. 세 절은 진묵이 머물렀던 곳이었다. 송규가 만난 이는 비단장수 최도화였으며, 대종사는 내장사에서 삭발하고 하산(下山), 최도화의 안내로 경성에 가서 박사시화·이동진화·이공주 등 창립인연들을 만난다.
▲ 수운대신사.


한말 수운대신사

대종사님의 전생이 수운대신사(水雲大神師)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원기16년(1931) 추석 쇠고 10월초, 소태산 박중빈은 근본을 찾는다는 일념으로 불법연구회 2대 회장 조송광과 경주에 가 박씨왕들의 오릉(五陵)과 현곡면 최수운의 묘소를 참배하였다. 이때 종사주께서 혼잣말 하더라는 것이다. "내가 다시 몸을 받아 내 묏등에 와 절을 해도 날 알아볼 이 없을 것이다." (김영신 〈구도역정기〉)

수운은 한울님 계시를 받아 통령, 강고한 유생들로부터 서학(西學)으로 몰려 5년만에 대구감영 관덕정 마당에서 참형당하고(1864) 27년 뒤 다시 이생에 오게 된다. 미국의 최면요법가 마이클 뉴턴은 19명의 상담자를 대상으로 연령 퇴행을 실시하여 임상결과, 사후 바로 오는 경우도 있겠으나 통상 30년 주기로 환생한다고 밝혔다.(〈영혼들의 여행〉, 나무생각)

대종사 26세시 병진년(1916) 노루목에서 동학꾼들로부터 수운 득도당일 한울님의 말씀 '태극(太極)과 궁궁(弓弓)' 이야기를 듣고 일원대원(一圓大圓) 소식을 깨쳤다.

※ 소태산 박중빈은 석두거사, 대종사, 종사주, 종사님이라고도 불렸다.

▲ 박청천 교무/교화훈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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