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재훈 회장/원불교문인협회
원기69년(1984) 통권 120호(8월호)를 기점으로 교단의 기관지 〈원광〉은 '월간' 형태로 전환했다. 〈원광〉은 〈월말통신〉 〈월보〉 〈회보〉로 이어온 교단의 기관지로서 원기34년(1949) 7월31일에 고고의 성(聲)을 울리고 창간되었다. 그 후 순간, 또는 계간 형태로 속간되어 오다가 원광사 사장으로 봉직하던 박정기 교무와 박달식 교무의 노력으로 '월간'이 된 것이다. 원불교 재가출가 문인들은 대부분 위에 열거한 〈월말통신〉 〈월보〉 〈회보〉 〈원광〉 등과 〈원불교신문〉에 문학작품을 발표했다. 물론 '원불교문인협회'가 원기75년(1990) 3월 3일에 창립되고 〈원불교문학〉을 발간했을 때에는 집중적으로 그 문학지에 게재하기 시작했지만.

선진들의 뛰어난 문학작품

원기69년(1984) 가을, 어느 날이었다. 필자는 출판사에 오래 근무했고 문학지를 만든 경험을 참작해, 처음으로 월간 〈원광〉 편집장으로 발령받았다. 하지만 원불교에 대해선 잘 몰랐던 게 사실이었다. 그 무렵 오후 3시~4시경에는 원광사 공무국에서 근무하던 이정식 선생이 찾아와 필자와 커피를 마시곤 했다.

"이 선생님, 올해 농사도 풍년이다지요?" "그래요. 모든 게 다 사은님 덕분이에." "…… 이 선생님, 어릴 때에는 논에 가서 메뚜기를 잡아다 볶아먹곤 했는데, 요즘은 농약을 쳐서 메뚜기가 없다지요."

"그렇대요. 그런데 난 영광에서 태어났지만 한번도 메뚜기를 잡아보지 않았어요." "왜요, 영광 논에는 메뚜기가 많았을 텐데요?"

"아버님께서 살생을 하면 안 된다고 하시어 한 번도 메뚜기를 잡지 않았어요." "아버님이 누구신데요?"

"지금은 열반하셨지만 응산님이세요."

아, 그러셨구나. 나는 깜짝 놀랐다. 필자는 그 당시 〈새 회상 시가 모음〉이란 책의 편집과 교정에 전념하고 있을 때였다. 그 책의 색인을 만들면서 보니까 시가가 제일 많은 선진이 구타원 이공주 법사였으며, 그 다음으로 많은 시가를 집필한 선진이 바로 응산 이완철 법사였기 때문이다.

〈대종경〉에도 서울교당에서 있었던 대종사님과 응산님의 일화가 있을 뿐더러 많은 교무들이 여러 가지로 응산님의 훌륭한 점을 말씀하곤 했다. 그런데 그 분의 아들이 이정식 선생이다니! 필자는 그 뒤로 선진들의 문학작품에 더 흠뻑 심취됐다.

다음에 소개하는 작품 외에도 수백 편의 주옥같은 문학작품이 우리 회상의 보석창고에 듬뿍 담겨 있다(기회가 닿으면 〈원불교신문〉에 선진들의 작품과 그 해설을 연재해 보고 싶은 심정이다).

'가을 뜰의 국화'

어젯밤 찬바람에 모딘 서리 부딪치니 / 산과 들에 각색 화초, 넋을 잃고 울고 섰네./ 고운 자태 다 변하여 시들시들 이울이니 / 처참한 그의 꼴은 차마 볼 수 없었더라./ 일시 번영 가졌다고 무한년(無限年)을 자랑터니 / 오늘날 이 허망을 네가 어찌 몰랐더냐./ 저 밑에 남모르게 숨어 있던 국회임은 / 이 시절을 반겨 맞아 활기띠고 홀로 서서 / 저네들을 비웃는 듯 벙실벙실 웃고 있다./ 제 아무리 풍상인들 네 정절(貞節)을 어쩌려고 / 엄연자태 뽐내면서 씩씩하게 자랑하니 / 아아, 청고한 네 절개를 이제야 알았노라. (응산 이완철 작)

우리 회상의 초창기, 그 험난했던 상황 속에서도 피는 듯이 열리는 법계(法界)의 환희가 함축하다 못해 터지고야만 멋, 흥, 그리움, 노래, 춤 등이 원불교예술이며, 그 가운데 글로 발산된 것이 바로 원불교문학일 것이다. 우리는 선진들의 많은 문학작품들을 토양삼아 더욱 더 진지하고 더욱 더 멋들어진 작품을 빚어내야 할 책무가 있는 것이다.

얼마나 높고 또 높아지고 얼마나 공부하고 또 공부해야 우리는 문학의 혼이 깃든 선진들의 하늘에 닿을 수 있을까. 몸속의 땀방울을 문학의 빗방울로 바꾸어 온 산하에 뿌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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