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령열위 법은法恩 기리는 원불교 역사의 묘우廟宇

▲ 익산성지 영모전의 모습, 영모전 광장에서는 대산종사 대사식과 대산종사탄생100주년기념대회 등 교단사적인 행사가 이뤄졌다.
익산성지를 순례하다 보면 가운데 푸른 잔디 광장을 발견할 수 있다. 성지주변의 나무와 드넓은 광장은 허브 역할을 하며 순례객에게 평화를 가져다 준다. 광장 중심부에 위치한 곳이 영모전(永慕殿)이다.

익산성지 영모전은 원불교개교반백년기념사업의 하나로 원기56년(1971) 9월에 건립됐다. 소태산 대종사를 비롯해 역대 선영 열위의 법은을 영원히 사모하기 위해 위패와 역사를 봉안한 묘우(廟宇)인 것이다. 원불교에서는 각 영위의 개별위패를 봉안하지 아니하고 공동위패를 봉안한다. 본좌로 대종사 소태산 여래위를 비롯 재가출가 교도들의 역대 선영 열위를 봉안하고, 별좌로는 희사위와 일반부모 선조위, 선성위와 일체생령위를 봉안해 기념제ㆍ천도재 등을 지낸다. 교단에서는 매년 6월1일 육일대재와 12월1일 명절대재에 정기적으로 향례를 올리며, 교단의 큰 행사와 사업의 시종을 고하는 의식을 올린다. 종법사, 수위단 선출 봉고부터 예비교무들 정기·상시훈련의 시작과 끝 등의 교단사적인 시작과 끝일 때 봉고의 예를 올린다.

영모전 위패의 의미

건물의 내부를 보면 불단에 위패가 조성되어 있다. 모셔진 위패는 대종사 위패와 역대 교단의 재가출가 교도를 비롯해, 부모 선조의 위패를 함께 봉안하고 있다. 중앙상단의 소태산 대종사 여래위 위패를 중심으로 아래에는 종사위 위패가, 그리고 좌우로 대봉도 대호법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종사위 위패는 역대 종법사를 지낸 분, 법위가 출가위 이상에 오른 분들을 모신 위패로써 재가와 출가의 구분이 없이 모신 위패이다. 종사위의 위패를 중심으로 하여 왼쪽에는 대봉도위, 전무출신 각등위, 보통출가교도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으며, 우측에는 대호법위, 거진출진각등위, 보통재가교도위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대봉도는 원불교에서 수여하는 법훈으로서 공부성적과 사업성적을 합산한 원성적이 정특등에 해당되는 전무출신이 받게 되며, 거진출진의 경우에는 원성적이 정특등에 해당되는 경우 대호법의 법훈을 받게 된다. 좌·우측의 맨 끝에 위치하고 있는 보통출가교도위와 보통재가교도위의 위패는 전무출신과 일반교도로서 원성적이 정5등 이하에 해당되는 경우를 말한다.

원불교 재가출가 교도들은 열반시 각 등위에 해당되는 자격에 따라 교단의 법보에 오르게 돼 그 해당하는 위에 모셔지게 되는데, 이상의 위를 본좌라고 표기한다. 그리고 본좌와 달리 별좌로 모셔지는 대상이 있는데 그 대상으로는 희사위, 일반부모선조위, 선성각위, 일체생령위로 구분돼 있다.

희사위와 일반부모 선조위는 본좌의 좌측에 모셔지고, 선성각위와 일체생령위는 우측에 모셔지는데, 희사위란 공부성적이 정식법강항마위 이상에 오른 재가출가 교도의 부모가 모셔지게 되며, 희사위 대상자의 약력과 사진 등이 법보에 함께 모셔지게 된다. 그리고 일반부모선조위는 그 명단과 약력은 없지만 모든 교도의 부모와 선조를 함께 모시는 의미로 볼 수 있다. 마지막으로 선성각위는 역대 성현들의 위패를 함께 포함하는 것이며, 일체생령위는 무연의 중생까지도 모두가 일원대도 교법의 은혜를 입고 불연을 맺기를 축원하는 의미를 담고 있다.

우리 교단의 영모전이 지니는 의미는 추모 그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먼저 소태산 대종사 재세시부터의 재가출가 교도에 대한 명단, 약력을 갖추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교조 당대로부터 현대사회에서 적용되는 교단의 행정체제를 갖춰 놓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 대한 예우가 재가출가 교도에 대한 구분이 없다는 것이며, 출가를 했다 할지라도 가족을 떠나지 않고 부모에 대한 보은을 함께 하는 의미가 별좌를 통해 희사위로 받들어 모시고 있다는 것이다. 또한 교단의 공도자뿐 아니라 세계의 모든 성현과 모든 중생을 함께 포함하여 모시고 있다는 것에서 그 의미를 찾을 수 있겠다.
▲ 영모전 내부의 모습, 중앙 소태산 대종사 위패를 중심으로 본좌와 별좌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영모전과 개교반백년기념성업 건설사업

당시 개교반백년기념성업 중 중앙총부의 영모전 건립은 반백년기념관과 종법원, 정산종사성탑, 숙소, 정원, 영산성지장엄, 서울기념관 등과 함께 건설사업 부문으로 진행됐고, 개교반백년기념성업은 당시 우리 교단 최대의 관심 사안이었다.

원기55년(1970) 3월21일 대한건축사업회 강명구 회장과 홍익대학교 전명현 교수를 초빙해 중앙총부 건물배치에 대한 자문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건축물 배치에는 원칙이 있다. 대지와의 관계와 외부공간의 구성, 평면구성 등 건축물을 어떻게 배치하고 조화를 이루며 효율적인 공간을 만드는가이다. 총부 구내의 대지는 평지가 아니고 일부는 구릉지대다. 대지 자체로서의 축선을 정하기가 힘든 구조였다. 따라서 건물배치에 앞서 어떠한 축선, 즉 사람으로 말하면 척추와 같은 선을 정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긴요한 일이었다. 강 회장과 전 교수는 "축선을 정해놓으면 건물배치는 축선을 따라 적당히 해도 좋다. 따라서 총부 구도를 구성할 때 철도 방향보다 자동차 도로로 들어오는 길을 주로 삼아야 할 것이다. 모든 질서라는 게 이 주축이 있어야만 가능하다"고 말했다.

당시 중앙총부의 신축건물 배치는 2천년대 즈음에 다시 들어서게 될 건물배치까지 예상해야 했기 때문에 축선의 선택은 총부의 전체적인 구도를 선택하는 것이었다. 그때의 총부 주축은 소태산 대종사의 성탑에서부터 뻗어난 길이라고 판단했다. 그 길이 많이 흐트려져 있는 모습이었는데, 이때 새로운 축을 정하자는 의견으로 제 1축과 제 2축의 기본 구성을 만들게 됐다. 제 1축 구성은 총부정문에서 직선으로 정화원 건물자리(현재 허물어 공터가 됨)까지를 이루고 다시 그 앞에 큰 광장을 이루고, 제 2축은 광장에서 성탑까지의 직선 도로로 하자는 내용이다.

총부의 구도를 살펴본 이들은 "종교적인 건물에 대해서는 다소 건축적인 기능을 약간은 무시하여도 상관은 없다"는 의견을 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나름대로의 원칙이 있어야 함을 말하며 총부의 새 건축물 배치에 있어선 건축학적인 원칙만을 좇을 수 없다는 의견도 함께 했다. 기념물적인 건물은 학교나 기숙사같은 건물과는 달라 채광같은 것엔 영향을 받을 필요가 없음을 말하며, 외형보다 내부에서의 숭엄성을 강조했다.

윈기55년(1970) 3월29일 기념관과 영모전의 기공식이 신축부지에서 거행됐다. 영모전의 건물양식은 석축을 쌓은 누대 위에 시멘트 현대식 건물로 지어졌다. 지붕은 청기와를 얹은 반쪽 지붕으로 한국 건축의 곡선미와 서구 건축의 웅장미가 조화를 이뤘다. 이 건물은 건축 당시 한국 건축심사에서 장려상을 수상한 건물로 지붕의 건축양식이 특이하다. 현판은 고산 이운권 종사가 썼다.

또 건물 앞에는 잔디의 넓은 광장이 있어 총부에서 벌어지는 각종 큰 야외 집회 행사가 치러지도록 만들었다. 처음 조성할 당시의 영모전은 잔디를 입힌 광장의 모습이 아닌, 산책로 혹은 수목원의 모습과 비슷한 풍경으로 묘목을 심어 가꾸었으나 후일 잔디밭 광장을 조성하여 교단의 행사를 진행할 때 집회의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특히 대산종사와 좌산상사의 대사식과 대산종사 발인식, 대산종사탄생100주년기념대회 등의 교단사적인 행사가 이뤄진 곳이다.
▲ 영모전 좌측에는 천도재를 올리는 불단이 조성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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