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칼럼



▲ 여도언 교도/해운대교당

목소리 함께 낼수록 표어가 현실화 돼

효율적 대처 위한 정보의 공유 절실


숲에서 나와 어정거리던 여우가 냇가로 몰려가는 한 무리의 오리에게 이기죽거렸다. "너희는 왜 떼거리로 몰려다니며 시끄럽게 구냐. 나같이 혼자서 조용히 다니면 인생이 덧나냐." 암컷 오리가 삐죽대며 대꾸했다. "우린 약간 소란스럽지만 남을 속이거나 해코지 하진 않아요. 우리는 정보를 얻으면 지체 없이 서로에게 전하지요. 수다스럽게 보이는 건 그래서 입니다. 그래야 힘이 약한 우리가 위험한 순간을 재빨리 알아채고 잘 대비할 수 있거든요."



오리들이 정보를 공유하기 시작한 것은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얼마 전만해도 오리들은 권횡동물(權橫動物) 때문에 숱한 고통을 겪었다. 부당한 행패가 저질러졌지만 오리는 자기들이 힘이 약해 그런 것이라며 이런 상황을 그냥 받아들이고 있었다. 오리들은 그래도 믿는 바가 있었다. 멋진 어휘와 우아한 표현으로 만들어진 표어(標語) 때문이었다. 오래 전에 농장주인이 가져다준 표어를 오리들은 정성스레 액자에 담아 넣었다. 그리고 이 액자를 농장 벽에 걸며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첫째, 농장의 모든 권력은 오리들로부터 나온다. 둘째, 농장 구성원으로서 존엄과 가치를 지니며 행복을 추구할 권리를 가진다. 셋째, 오리는 기본적 생존권을 보장받을 권리가 있다. 표어의 문장은 아름답고 찬란했다. 오리들은 표어에 대한 기대감으로 옆 동네 동물들을 만나면 우쭐대기까지 했다. 물가로 나갈 땐 신바람이 났다. 목을 치켜들고 꼬리를 흔들어댔다. 힘센 동물이 침노해도 표어가 굳건히 지켜줄 것으로 확신했다. 그들도 표어를 공경하여 더 이상 농장 안으로 넘어오지 않을 줄 알았다. 밤이 오면 삶의 고단함을 잊고 깊은 잠에 들 수 있겠다고 좋아했다. 살벌한 세상은 이제 끝날 것으로 여겼다.



침입자의 손아귀에 당하는 날은 그러나 끊이지 않았다. 시련은 밤마다 여지없이 찾아왔다. 표어가 나붙기 이전이나 이후나 노략질은 변함없이 자행되었다. 해가 뜨면 몇몇 동료들을 더 이상 볼 수가 없었다. 더 충격적 일은 자기 권리를 내세우며 대낮에도 거리낌 없이 일족들을 낚아채 가는 주인의 행태였다. 먹을거리를 챙겨주고 잠자리를 제공해 왔기 때문에 자신은 이 행동에 양심의 가책을 느낄 필요가 없으며 떳떳하다는 것이 주인의 주장이었다.



오리들은 약탈이 사라지지 않는 이유를 깨닫지 못했다. 표어만 있으면 평화와 안전은 저절로 주어지리라 확신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현실의 부당성을 깨닫는 데는 많은 날을 보낼 필요는 없었다. 믿었던 표어의 배반이라며 여기저기서 울분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오리들은 더 이상 이렇게 당할 수만 없다며 힘을 모으기로 의견을 모았다. 터놓고 이야기해보면 좋은 방책이 나올 것이라며 자신감을 나타내 보였다. 여럿이 힘을 모으면 거대한 폭력에 맞서 싸워 이길 수 있다며 의기투합했다. 무엇보다 어두운 밤 어디서 무엇이 어떻게 기습해 오리라는 정보를 알아내는 것이 긴요했다. 이 정보를 빨리 얻지 못하면 무리를 안전하게 보호하고 싶어도 성공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스산한 밤에 이웃들은 제 몸 하나 지키기 벅찬 신세였다. 이웃의 도움을 기대하기는 언감생심이었다.



경상도 오리가 발언대에 먼저 올랐다. "수탈자에 대한 정보를 신속히 획득해야 합니다. 그래야 각자가 불의의 습격에 대비할 수 있습니다." 서울 오리가 말을 이었다. "효율적 대처를 위한 정보의 공유가 절실합니다. 각자 알아서 대비하는 것보다 여럿이 힘을 모아 함께 목소리를 내면 변화를 쉽게 이끌어 낼 수 있습니다." 전라도 오리가 마지막으로 나섰다. "함성이 단발로 그쳐선 실패하며, 필요할 때 매번 함께 질러야 성공 가능성이 큽니다."



오리들은 시간이 갈수록 자기들 삶이 정치의 그물 안에 놓여 있음을 절감했다. 그물이 해지거나 그물코가 떨어지면 혼자만 그 사실을 알고 조심하는 것보다 이웃에게 알리고 함께 대처하는 것이 으뜸임을 인식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목소리를 함께 낼수록 표어가 현실화되는 짜릿함을 맛보기 시작했다. 자신들이 수고한 만큼 후손들에게 자랑스러운 역사를 물려줄 수 있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농장에선 차츰 살기 번득이는 밤의 눈빛들이 사라져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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