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광장 천막 카페, 세번의 여름과 겨울
진정한 종교는 기도했다면 정의롭게 행동해야

▲ 양민철 목사/구리시 희망찬교회

세월호 참사는 2014년 고난주간 수요일에 발생하였다. 부활절 아침이 되었음에도 구조의 소식은 없었다. 슬픔의 날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승리와 영광을 노래할 수 없었다. 중요한 기독교 절기지만 이웃의 고통을 외면할 수 없었다. 조심스럽게 교인들에게 문자를 보냈다. "부활절을 무기한 연기하고 애도 기간을 갖자"는 내용이었다. 이런 뜬금없는 제안에도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어떤 형제는 매우 잘한 결정이라고 격려의 답장을 보내왔다. 직장 동료들에게 교회의 결정을 알렸더니 "요즘 이런 교회가 있느냐?"고 반문하였다고 한다.

대신 우리는 4월27일 '노란리본달기 추모행사'를 열기로 했다. 주일예배를 마친 후, 교인들은 노란리본에 글을 썼다. '잊지않겠습니다', '미안합니다', '진실의 그날까지 함께하겠습니다', '우리 곁을 떠난 당신들은 하늘의 별이 되었습니다' 노란 리본을 교회당 철난간에 달았다. 흐느끼는 울음이 끊이지 않았다. 가랑비가 내렸다. 내 생애 가장 슬픈 주일이었다.

2014년 여름,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제정을 위한 단식농성이 시작됐다. 이 기간에 '거리의 목사' 친구가 커피봉사를 요청했다. 광장엔 연일 엄청난 인파가 모였고 커피봉사는 눈코뜰새 없이 바빴다. 그렇게 시작한 천막카페 사역은 그 해 11월부터 현재까지 매일 이어오고 있다. 광장의 여름은 불가마와 다름없었고, 거센 바람이 부는 겨울은 혹독하기 이를데 없다. 광화문 세월호광장에서 세 번의 뜨거운 여름을 보냈고세 번째 겨울을 맞고 있다.

광야같은 광장에서는 물이 있어야 버틸 수 있다. 고인을 추모하고 가족을 위로하는 장례식장에서 가장 넓은 장소는 식당이다. 슬픔을 이기려면 함께하는 사람들이 있어야 한다. 그래서 광장에 카페를 차린 것이다. 커피는 단지 음료가 아닌, 소통과 연대의 도구다.

1월 9일은 세월호참사 1000일 되는 날이었다. 광화문은 더 이상 세월호광장만이 아닌, 생명과 평화를 사랑하고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가 되기를 바라는 민주시민의 광장으로 거듭났다. '국민촛불'이 광장을 거듭나게 했다. 3차 촛불집회 후 유민아빠 김영오 씨가 천막카페에 왔다. "너무 기쁘고 국민들에게 고마워서 화장실에 가서 울고 왔다"고 했다. 나는 "유민아빠가 목숨 걸고 단식한 결과다"라고 전해주었다. 많은 봉사자들과 종교인들도 광장을 지켜왔다.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천막카페〉는 기독교 사회참여 활동이며, 한국사회 고난의 현장을 찾아가 함께하기 위해 설립된 개신교 단체다.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는 말씀의 실천적 행동이다. 더 이상 종교인들이 교회나 교당에 머물지 말고, 고난받는 이들 곁을 지켜주어야 한다.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안이라고 피한다면 비겁한 종교가 된다. 나는 고난받는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믿는다. 종교는 기도와 같은 종교적 영성에 머물지 말고 사회정의를 위해 행동하는 사회적 영성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 기복적 신앙에 머물지 말고 종교의 사회책임에 대해 고민하고 실천해야 한다.

누군가의 말이 기억난다. "천 번의 기도보다 한 번의 피켓팅이 도움이 된다." 기도는 이미 충분하다. 기도하는 사람이 행동하지 않기 때문에 진실이 가려졌던 것이다. 기도했다면 정의롭게 행동해야 한다. 용기있는 종교인들은 세상의 악을 억제시키고 어두운 세상을 희망이라는 횃불로 밝힐 수 있다.

천막카페는 2015년 9월부터 '아이들의 책가방', '종교인 대화', '광장신학 마당' 등 다양한 내용으로 목요문화제를 해왔다. 문화제를 준비하며 원불교 기도회를 보게 되는데 늘 감동과 용기를 얻는다. 촛불집회 이전의 세월호광장은 외로운 곳이었다. 이런 광장을 원불교 기도회가 지켜왔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다.

작년 9월, 원불교 교무와 재가교도 500여명이 광화문 광장에서 '평화명상기도회'를 열었다. 사드배치를 반대하고 한반도 평화를 위한 침묵 기도회였다. 그날 엄청난 비가 내렸지만 미동없이 자리를 지켰다. 이 광경을 보면서 종교의 힘을 느꼈다.

진정한 종교는 권력 앞에 당당하다. 진정한 종교는 고난받는 이들의 곁을 지킨다. 진정한 종교는 정의롭다. 이땅의 모든 종교가 권력 앞에 당당하고 고난받는 이들의 곁을 지키는 정의로운 종교가 되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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