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불어' 사는 자세를 넘어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로의 불공

▲ 이공현 교무/은덕문화원
인간은 만물의 영장이다. 근대 합리주의 철학자이자 수학자인 데카르트의 믿음이다. 그는 사고하는 인간이 동물보다 우월하다는 신념아래 죄책감 없이 생체실험을 했다. 인간을 제외한 모든 동물은 감정, 이성, 영혼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그러나 그는 생체실험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동물들을 보며, '어떻게 실제로 고통을 받는 표정을 할 수 있을까?'를 반문했다.

2017년, 인간중심 사고에 다시 화두를 던진다. 지구에는 약 150만종의 생명체들이 의탁해 산다. 생명체란 생명현상을 나타내는 물체이다. 천체물리학은 우주는 약 137억년을 통해 지구 생명의 역사를 전개했다고 본다. 모든 생명체는 137억년 우주의 시간을 품고, 생로병사를 경험하며,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그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 진리적 산물인 것이다. 70억의 인간도 그 하나의 생명체다.

인간은 생명체의 개체 고유성을 지구역사에서 가장 강력하게 욕망해 온 주인공이다. 그 과정에서, 인간은 생명유지를 위해 다른 생명의 생로병사를 무분별하게 강탈해 왔다. 생명의 역사에서 생과 사는 일상의 과정이다. 아름답고 조화로운 순환이다. 그런데 인간의 자본주의 역사는 생명에 대한 집착과 죽음에 대한 회피를 키웠다. 생명집착은 생명존중과는 다르다.

생명집착은 인간을 위해 도축되고 살해되는 동물들을 천문학적 숫자로 양산했다.

육식이 대표적이다. 동물은 인간을 위해 살해된다. 실험동물만이 아니라 오락동물로도 살해된다. 정유년 새해, 우리는 AI(조류인플루엔자) 참사를 겪고 있다. A4용지보다 좁은 '닭 감방'의 밀집사육, 면역력이 저하된 닭들의 AI 전염, 참혹한 대량살생, 그리고 미국산 수입 계란의 등장, 인간의 탐욕과 무지에 의한 동물에의 죽음 강요, 이는 범죄이자 반인류적인 행위이다. 동물의 희생과 생명의 존중에 대한 고민은 영원한 주제다.

과연 인간은 생태계의 생로병사를 강탈할 특권이 있는가? 인간이 생명을 이용 대상이나 경제 가치로 본 과보는 되돌아오고 있다. 생로병사의 이치가 자연의 순환을 거스른 인과응보다. 인류의 세계관은 시대에 따라 변한다. 그 예가 노예제도와 인종차별이다. '모든 인간이 존엄하다'는 가치를 오늘의 우리는 의심하지 않는다. 이제 그 가치를 모든 생명으로 확산시키자.

현대진화론은 생명의 물질적 터전으로 DNA, 생명현상으로 유전자, 그리고 제2의 생명의 다양성을 환경 요인과 공생관계에서 새롭게 규정한다. 인류는 다른 생명체를 유전자 확산을 위한 도구로의 상대적 관점을 넘어 절대적 관계로 불공해야하는 중요한 시점에 와있다.

유엔은 지구상의 생물종을 보호하기 위해 생물다양성협약(CBD: Convention on Biological Diversity)을 체결했다. 원불교는 생물다양성협약을 넘어 생명존중을 구현해야 한다.

생명체는 비록 개체로서는 부분이지만 그 자체로 우주의 시공간 전체를 담은 존재이다. 인류역사에서 기성종교가 유기체적 통찰을 설해왔지만 과학정신을 포용하고 평등과 권리를 담아내지는 못했다. 그래서 원불교가 희망이다.

소태산 대종사는 인간과 동물을 일원의 한 포태 안에 한 기운을 이어받은 '없어서는 살 수 없는 관계'로 규명했다. 신앙의 대상임을 각성시킨 것이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 보다 우월한 관점에서의'더불어' 산다는 자세로는 안 된다. 이제, '없어서는 살 수 없는' 진리적 관계로의 회복만이 인류구원인 것이다.

"사은의 교리가 만 생령을 제도하는 가장 큰 길이며, 사중보은의 도리가 이 세상을 평화롭게 하는 가장 큰 원동력(〈정산종사법어〉경의편8장)이다. 모든 생명체의 은적 관계를 알았으니(知恩) 보은(報恩)만이 길이다. 모든 생명체를 부처님으로 존중하는 책임과 개선은 교도의 사명이다.

이제는 모든 생명체로의 공감능력이다. 인간의 욕망에 의해 목숨을 강탈당하는 '건져 주 살려 주 애끊는 저 생명들'의 고통에 함께하자. 행동하는 불공만이 우리시대의 해법이다.

모든 생명이 평화 안락한 하나의 세계, 보은의 세계, 균등의 세계를 누리도록 실지불공으로 응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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