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만명 블랙리스트, 세월호 서명·야당 정치인 지지가 이유
정부에게 호의적인 작품들만 수용하겠다는 위험한 발상
다양성이 존중되고 어울릴 수 있어야 건강한 국가

▲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달 21일 동시에 구속됐다.
1년 동안 받는 금액이 50만 원밖에 되지 않는 연극 단원들이 있다. 크게 돈이 되지 않는 독립영화를 틀어주는 극장들도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상황에도 불구하고 문화예술의 부흥을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살아가는데 지원금은 사막의 오아시스와도 같다.

어느 날, 이들에 대한 지원금이 끊기기 시작했다. 사업이 갑자기 사라지기도 하고, 포기를 종용 받기도 했다. 이유는 야당 인사를 지지했거나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 서명했기 때문이다. 정부의 입맛에 맞지 않는 행동을 했다는 이유. 그것이 문화예술 활동이 어려워진 이유였다.

군사정권 시대의 과거 이야기가 아니다. 2017년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지난해 말에 불거진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많은 사람들을 경악시켰다.

박근혜 정부에서 최고 실세로 꼽힌 김기춘(78) 전 청와대 비서실장과 출세 가도를 달린 조윤선(51)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이 지난달 21일 동시에 구속됐다. 이들을 기소한 특검팀은 청와대와 문체부가 블랙리스트를 작성·관리하며 문화예술 분야에 개입한 것은 자유민주주의의 핵심 가치인 사상·표현·언론 자유를 침해한 반헌법적 중대 범죄로 규정했다. 이제 특검의 칼끝은 이 리스트의 시발점으로 대통령을 가리키고 있다. 탄핵재판에서도 블랙리스트의 대통령 지시 여부는 가장 심각한 탄핵 사유가 될 것이다.

최초 블랙리스트 작성은 영국왕 찰스 2세

블랙리스트는 '임시 수출입 금지품목이 기입되어 있는 명부', 또는 '요주의 인물일람표'로 풀이된다. 블랙리스트를 처음 만든 사람은 1660년에 즉위한 영국 왕 찰스 2세다. 찰스 2세는 1649년 선왕 찰스 1세를 처형한 청교도혁명 주역들에게 반격을 가하려고 살생부를 작성했다. 그는 왕좌에 오른 뒤 살생부 명단 58명 중 13명을 사형, 25명은 종신형에 처했다. 이 명단은 '죽음'을 뜻하는 색, 블랙과 합쳐져 '블랙리스트'라고 불렸다. 이후 블랙리스트는 권력이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자신들이 필요한 영역에서 추방하려는 자들의 이름을 담은 명단을 뜻하게 됐다.

한국에서 블랙리스트는 엄혹한 군사정권 시절 다양한 명칭과 형태로 작성됐다. 유신 시절 박정희 정권은 대중가요 블랙리스트를 만들었다. 김민기 '아침이슬', 신중현 '미인', 송창식 '왜 불러' 등은 불온하다고 방송·공연을 금지했다. 박정희 정권은 '사이비 언론인 및 언론기관 정화'라는 명분으로 블랙리스트를 만들어 말 안 듣는 언론사도 통폐합했다. 박 정권을 강도 높게 비판해온 경향신문은 1966년 강제로 공매 처분됐다. 1970년대에도 동아일보 광고 탄압 등 비판적 언론과 말 잘 듣는 언론으로 구분해 관리했다.

1970, 80년대에 당시 중앙정보부는 동일방직 노동조합 와해와 재취업 방해를 위해 조합원 블랙리스트를 작성해 관리했다. 1990년 국군보안사령부가 민간인 1323명을 사찰하여 리스트를 작성·관리하고 있는 사실이 폭로됐고, 2009년에도 국군기무사령부가 민간인을 사찰한 사실이 밝혀졌다. 피해자들이 국가배상청구를 했고 법원은 블랙리스트 작성과 사찰이 국가의 불법행위임을 확인하고 손해배상 책임을 인정했다.
▲ 예술인들이 정부세종청사 문화체육관광부 앞에서 집회를 갖고 블랙리스트 의혹 가담자들의 사퇴와 처벌을 촉구하는 퍼포먼스를 하고 있다.
세월호 서명, 야당 정치인 지지가 이유

민주화 이후에 사라진 줄 알았던 블랙리스트가 박근혜 정부 들어 광범위하게 작성되고 시행됐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지난해 10월12일 한국일보의 보도로 블랙리스트 표지가 최초 공개되면서 그 실체가 드러나기 시작했다. 이 기사에 게재된 블랙리스트의 표지에는 세월호 정부 시행령 폐기 촉구 선언에 참여한 문화예술인 594인, 세월호 시국 선언 문학인 754인, 문재인 후보지지 선언 6,517인, 박원순 후보지지 선언 문화예술인 1,608인이라는 블랙리스트 대상과 인원수가 명시돼 있었다. 언론뿐만 아니라 문인, 예술인은 물론, 출판사, 극단에 이르기까지 그 규모도 방대해 1만 명에 이르렀다. 이 명단을 분석해보면 세월호 참사와 관련해서 정부에 비판적인 부류와 문재인, 박원순 등 야당 정치인을 지지하는 문화예술인이라는 두 부류로 구분할 수 있다. 간단히 말해 반정부적인 입장을 보였기 때문에 정부 차원에서 사찰하고 검열했다는 사실을 인정한 리스트의 최초 실물이었다.

문체부, 돈줄 끊기 위한 의도

SBS 최우철 기자는 '박진호의 시사전망대'에서 "문체부의 사업 과정에서 어떤 사람에게 돈을 주고, 어떤 사람에게는 돈을 줘서는 안 되는가를 상세하게 이유를 달아서 밝혀놓은 문건"이라고 했다. 언론사 가운데는 "한겨레, 한국일보, 경향신문, 미디어오늘, 오마이뉴스, 프레시안, 시사인, 한겨레21까지 포함해서 총 언론사 7곳이 좌파 성향 언론사로 명시가 돼있다"고 말했다. 해당 언론사 이름 옆에는 언론사에 지원하고 있는 명목들이 적혀 있다. 최 기자는 "이른바 돈줄을 끊을 방법을 궁리한 것으로 추측된다"고 설명했다.

어떤 이는 정부가 명단을 작성한 게 그렇게 큰 문제냐고 묻는다. 과연 그럴까. 선거에서 누구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혹은 세월호에 대한 표현을 했다는 이유로 지원 배제 명단에 올려놓고 작품을 못 올리게 하고 정부 지원에서 탈락시키며 각종 불이익을 주는 것은 민주주의 사회라면 결코 있을 수 없는 행위다. 이는 다양성이 존중돼야할 오늘날의 사회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다. 오로지 정부에게 호의적인 작품들만 국민들을 만날 수 있겠다는 의지, 문화예술을 정부의 이미지를 긍정적으로 만드는데 적극적으로 이용하겠다는 태도는 매우 위험하다. 유진룡 전 장관이 박근혜 대통령에게 건의했던 말처럼 "하나하나 내치기 시작하면 나중에는 한줌도 안 되는 사람만 남을 것"이기 때문이다.
▲ SBS 뉴스에서 최초로 문화체육관광부 블랙리스트를 입수해 보도했다. 출처:SBS 뉴스 화면 갈무리.
국민을 통제하겠다는 발상 사라져야

블랙리스트에 반발하는 문화예술인들은 지난해 11월 4일 시국선언 이후 최근까지 80일 넘게 광화문광장에 텐트를 치고 노숙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문화예술인들은 국가와 주동자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묻겠다며 손해배상 집단소송을 시작하여 원고를 모집하고 있다. 이렇게 국가와 김기춘, 조윤선 등 주동자에 대한 책임을 끝까지 묻는 것은 정말 중요하다. 이번이 자유민주주의 대한민국에서 마지막 블랙리스트여야 하기 때문이다.

정부기관인 문화체육관광부는 문화국가를 만들어가는 주무부서이다. 문화·예술 발전은 표현의 자유와 창의성 보장이 전제돼야 한다. 정권 입맛에 맞지 않는 문화인일지라도 창작의 자유를 누릴 때 비로소 문화융성은 꽃을 피울 수 있다. 문화융성이 박근혜 정부의 4대 국정기조의 하나라는 점에서 블랙리스트는 자가당착이자 자기부정이다.

'PD수첩'과의 인터뷰에서 진중권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의견이 통일되어 있는 나라보다 다양한 의견들이 충돌하는 나라가 혼란스러워 보일지라도 훨씬 더 유연하고 강력한 체제라는 믿음. 그것이 자유민주주의에 대한 믿음이다." 다양성이 존중되고 어울릴 수 있는 나라. 그것이 민주주의의 나라다. 국민을 통제하겠다는 블랙리스트는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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