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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태산 십상 2 / "엄니, 노루목에 달 따러 가자"
소태산 십상 2 / "엄니, 노루목에 달 따러 가자"
  • 박청천 교무
  • 승인 2017.02.17
  • 호수 183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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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촌마을에서 본 노루목. 오른편 작은 봉우리가 머리에 해당되고, 왼편 큰 봉우리가 몸통에 해당한다.
▲ 일러스트=안세명 교무
대종사 십상, 원기39년 9월8일 정산종사 의해 제정
서면교당 이경순 교무의 요청으로 십상 명칭 초안
최초 십상도 전하지 않아…이후 십상도 각자 취향류 작품에 불과

올 봄 무심코 영산에 걸어가다 송림 속에 쑥 올라오는 달을 보고 깜짝 놀랐다. 달이 어찌나 밝고 두렷한지 놀란 가슴을 진정할 길 없었다.

영산원의 보름달이 우리 님의 얼굴이신가
옥녀봉의 어여쁜 자태 우리 님의 모습인가
노루목의 솔바람이 우리 님의 말씀이신가
삼밭재 양지평이 우리 님의 포부이신가.

영광에 가려면 초승이나 그믐에 가지 말고 보름에 가라. 보름날 밤, 노루목에 떠오르는 달은 어느 곳에서 보는 달보다 정답고 맑고 깨끗한 달이다.

<대종사 추모담>의 대가 승산 김형오 선생이 대종사 소설 집필을 계획하면서 구술한 내용이다. 그때 복경씨한테 들은 것이라면서 이 이야기를 했다. 최복경씨는 대종사님의 네 살 손아래 이종사촌 동생이다.

노루목에 달 잡으러 가자

노루목에 달 뜨면 네 살짜리 어린아이 진섭은 어머니 등에 업혀 등을 두드리며 졸라댔다.
"엄니, 노루목에 가자."
"뭣하러 갈래?"
"달 잡고 싶어."
이때 벌써 진섭은 저것이 무엇인가, 잡고 싶어 했다. 진섭의 특성이 한번 하기로 한 것은 끝을 보고 마는 성미다. 아마도 진섭의 보챔에 못 이겨 어머니는 노루목까지 갔을 것이다.
"봐라. 보름달이 쩌으그 산 위로 올라가뿌렸다."
"쩌으그 산 위로 올라갈쳐"
유씨가 진섭을 들쳐업고 노루목 뒷산 위(중앙봉)로 올라갔을까.
"어두워서 안된다. 낼 밝거든 올라가자"

영촌에서 동쪽은 선진포, 노루목은 남산이 된다. 선진포에서 떠오른 보름달은 노루목 하늘 위에 머물 때가 가장 아름답다.
영촌에서 노루목 가는 길은 남쪽으로 밭 가운데로 난 한길이다. 도보로 800보 남짓, 노루목 잔등 아래 개울 징검다리를 건너면 바로 노루목이다. 이 개울은 노루목을 돌아 현재 도로를 따라 강변나루로 흘러갔는데, 1955년 10월부터 절강(浙江) 공사를 시작, 불도저를 동원시켜 영촌으로 물길을 돌려 1958년 12월에 완공하였다.

1960년 1월 정관평 재방언공사를 완공, 20정보를 간척하여, 1차 방언공사의 배가 되는 농지를 확보했다. 옛 물길은 도로가 되었고 영촌 앞으로 개울이 생겼다. 강변주막이 있던 강변나루터는 백수 해안도로 갈림길 삼거리가 됐다.

진섭이 네 살 때는 1894년 갑오년이다. 녹두장군 전봉준에 의해 한민족 농투성이들이 일치단결하여 농기를 들고 일어선 해다.
아침식사 때 진섭이 아버지의 고봉밥을 덜어가다가 꾸중을 들었다. 무색해진 진섭이 "아부이를 놀래게 해줄텨" 약속을 했다.
"아부이, 노루목에 동학당이 나타났어!"

그날 점심 직후에 진섭이가 다급하게 외치는 소리에 박성삼(진섭의 부친)은 놀라 집 뒤 대나무밭에 숨었다. 당시 엉터리 동학당이 많이 설쳤다. 굶주려 사나워진 주민들이 단합하여 살림이 여유 있는 집들을 털었다. (영광사람들은 동학농민군과 차별화하여 폭민들을 '동학당'이라 불렀다) 박성삼이 읍내 조 승지 전답을 관리하는 마름을 맡고 있었기 때문에 살림이 유족하게 살았다. 춘삼월 보릿고개 무렵이었다.

▲ 진섭은 노루목에 이어 옥녀봉에도 걸려있는 달을 잡기 위해 장대를 들고 산에 오르곤 했다.
구름 잡으로 옥녀봉에 올라가

진섭은 일곱 살 때 구름을 잡기 위해 동무들과 망태 메고 장대 들고 옥녀봉에 올라갔다. 장대들고 뒷굼치를 들고 폴짝폴짝 뛰기도 하며 구름을 잡으려고 하였으나 저만큼 달아나버렸다. 쪼그리고 앉아 시름에 잠겼는데 어느덧 뉘엿뉘엿 해가 지고, 동네 지붕 굴뚝에서 연기가 모락모락 오르고 있었다. 진섭이 손바닥을 딱 내리쳤다.
"맞다! 연기가 올라와 구름이 되는겨!"
쏜살같이 동네로 내려갔다.
진섭이 열한 살 때 이화숙 훈장의 글방에 다녔다. 첫날 〈천자문〉을 배우기 시작하며 '하늘 천' 첫 글자에 의심이 걸렸다.
"훈장님, 하늘이 왜 푸르유?"
"떼끼녀석, 하늘이 푸르니까 푸르지."
진섭은 글자만 가르치는 훈장에게 더 이상 배울 게 없다고 생각했다.

동지팥죽 안 준 일로 해서 집채 만한 땔감더미에 불을 질러 훈장을 놀라게 한 사건으로 이후 발을 끊었다. 그 일로 해서 동네에서는 진섭이 천자문도 못 뗀 것으로 소문이 났다. 〈원불교교사〉에도 글공부를 2년밖에 못한 것으로 기록됐다.
하지만 사실과 다르다. 박성삼은 임씨 소생 2남1녀, 후처 유씨 소생 3남2녀를 두었다. 그는 5남3녀 가운데 가장 총명하고 야무진 4남 진섭이 큰 인물이 될 줄 기대하고 있는데 글공부를 그만두게 할 리가 없었다.

진섭은 구호동의 7세 연상인 김화천 훈장의 글방에 열다섯 살까지 다녀 〈통감〉 2권째에 문리가 터지며 글공부는 그만두었다. 글방친구 고현태의 증언이다. 결혼 직후 서방님 글 읽는 소리가 제일 컸다고 양하운 대사모도 회고했다.
▲ 소태산 탄생가 전경, 진섭은 노루목에 걸린 보름달을 보며 어머니에게 '달 잡으러 가자'며 졸랐을 것이다.
대종사십상, 원기39년에 정해

<대종사 10상>은 정산종사에 의해 원기39년(1954) 9월8일에 제정되었다.
서면교당 이경순 교무의 요청에 의하여 대종사 십상의 명칭을 초안했다.
①관천기의상 ②삼령기원상 ③구사고행상 ④강변입정상 ⑤장항대각상 ⑥영산방언상 ⑦혈인서천상 ⑧봉래수양상 ⑨익산전법상 ⑩계미열반상. (이공전, 〈범범록〉 시탕일기 530쪽)

서면지부장 양달석 화백에게 10상도를 의뢰하였으나 그의 십상도는 현재 전하지 않는다. 이후 여러 작가에 의해 수편의 십상도가 이뤄졌다. 그러나 초기교단사에 대한 기본 이해가 없는 자기 취향류의 작품에 그치고 말았다.
한말 외세의 압박과 주변국가 정세, 후천개벽 성현들의 출현, 영광 지세와 풍속, 당시 민족종교와 도꾼들의 성향, 불법연구회 성립과 전개, 일제 수난과 대응, 소태산의 생애와 사상 등 사실에 근거한 공부를 해야 제대로 된 십상도를 그릴 수 있다.

십상도 작업은 얄팍한 상식과 그림 재주로 그리는 게 아니다. 순수한 열정과 진중한 태도, 그리고 도덕사업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전제되어야 한다.
불후의 명작 '대종사 십상도'를 고대한다.
▲ 박청천 교무/교화훈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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