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단 어머니로 헌신한 일생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주관한 '개벽의 시대를 연 원불교 여성 10대 제자' 학술대회는 그동안 연구가 부진했던 여성 선진들의 활약상을 엿볼 수 있는 자리였다. 홍성교당 김종은 교무의 '일타원 박사시화 대봉도의 신앙과 교화활동'에 대한 연구발표는 초창기 교단의 여성교역자들이 모두 바치고 살았던 삶을 그대로 보여줬다.

그는 "구인선진이 회상의 체계를 세웠다면 여성계 선진은 교당 설립의 주역으로 구인선진 역할에 버금가는 활동을 했다"며 "특히 여성선진 10분 가운데 가장 연로한 몸으로 엄청난 교화를 펼친 일타원 박사시화(一陀圓 朴四時華, 1867~1946) 대봉도의 활동은 주목할 만하다"고 발표를 시작했다. 일타원 대봉도는 교단 제1대 내 입교 제일의 공적을 쌓았다. 초기 교단에 50여 명의 전무출신을 배출시켰고, 그 중에는 육타원 이동진화, 구타원 이공주, 상산 박장식 대원정사가 나온 홈실 박씨 문중을 입교시켰다.

그는 "일타원 대봉도는 불교 사찰의 화주로 활동하던 중 삼타원 최도화 대호법을 만나 소태산 대종사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 원기9년(1924) 2월에 소태산을 만났다"며 소개를 이어갔다.

당시 시대는 가부장적이고 불합리한 차별제도로 남존여비 사상이 보편화되어 차별받는 것에 대해 한이 맺힌 여성들이 많았다. 그러나 소태산을 친견한 일타원 대봉도는 그의 부처님 같은 인격을 넘어 남녀 대중이 신앙할 수 있는 불법(佛法), 남녀동일의 평등한 교리체계였던 '사은사요·삼학팔조'는 큰 희망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일타원 대봉도는 소태산에게 받은 〈삼대요령〉과 〈육대요령〉을 매일 보고 외우며 '혼몽 중에 있고, 취중에 있고, 사농공상의 차서 있는 교육을 받지 못하고, 직업 없이 놀고먹던 사람들에게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진리를 연마하며, 3개월 일하고 3개월 진리 연구하며, 도덕의 정신을 밝히는 원만한 사업을 성취하는 것'에 고취됐다"며 이러한 환의용약했던 법열이 엄청난 교화활동을 하는데 큰 밑거름이었음을 시사했다.

일타원 대봉도는 1867년 12월18일 전북 남원군 남원읍 동충리에서 출생했다. 어려서 효심과 우애가 극진해 16세 되던 해 어머니가 위독하자 단지(斷指)해 그 피를 어머니 입에 흘려 넣어 기적적으로 소생시켰을 정도다. 18세에 같은 고을에 사는 이순명과 결혼했으나 슬하에 자녀가 없었고, 33세 남편과 사별하고부터는 바느질로 생업을 시작했다. 바느질 솜씨가 뛰어났던 일타원 대봉도는 이로 인해 주위 많은 사람들과 인연을 맺을 수 있었고, 이때 도정궁 (都正宮) 노대부인을 알게돼 그의 수양딸이 된다. 불법승 삼보를 공경하는 독실한 불교신자였던 노대부인 영향으로 일타원 대봉도 역시 그 영향을 받아 구례 화엄사의 화주가 돼 원기8년(1923) 삼타원 최도화 대호법과 만나게 된다.

일타원 대봉도는 어느 정도 경제력이 있었으므로 행상 순교는 나가지 않고, 남원 지역일대의 연고지 교화에 주력했다. 그의 타고난 친화력과 열성적 교화활동은 이타원 장적조 대봉도, 삼타원 최도화 대호법과 더불어 교단에서 삼대여걸이라 불렸을 정도였다.

교단의 어머니로 전심전력을 다했던 일타원 대봉도는 원기31년(1946) 교역자 강습 중에 쓰러졌는데 '내가 할머니에게 사랑을 많이 받았으니 시탕과 간병을 하겠다'고 나서는 여러 후진들의 간병을 받았다. 그러나 그해 10월18일 밤 80세 일기로 손에는 염주를 들고 나무아미타불을 외우며 정산종사와 구타원 이공주 종사 등 7~8명의 후진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열반했다.

김 교무는 "일타원 대봉도는 초창기 교단에서 소태산 대종사를 생불로 믿고 알뜰히 받든 진실한 제자였고, 교법을 받들고 실행하며 널리 전하여 공덕을 쌓아 대종사가 하고자 하는 모든 일에 기저를 이뤘다"며 "이제 우리 후진은 그의 공덕을 역사에 길이 기록하고 널리 찬양 받도록 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여성 선진들의 다양한 연구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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