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회상 주비지(籌備地), 훈련 기틀을 갖추다

▲ 교단 최초 선 훈련을 기념하기 위해 원기70년 초선지 비를 세웠다. 소태산 대종사와 12제자들은 만덕암에서 3개월 동안 선 훈련을 통해 새 회상을 준비했다.
소태산 대종사가 친히 왕래한 인연으로 원기9년 익산총부건설 이전에 12인의 제자와 더불어 처음으로 수선(修禪)했던 만덕산 일대. 전북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에 위치하고 있으며, 초선지(初禪地)와 만덕산 농원을 포함하여 성지로 보고 있다.

원불교 교단에 있어 성지 또는 성적지의 분류는 변화를 보여 왔지만, 만덕산성지는 영산·익산·변산·성주와 더불어 일관되게 성지로 분류돼 왔다. 하지만 만덕산 성지는 원불교 초선지라는 상징성에도 불구하고 교단적으로 일찍 만덕산에 선훈련 도량의 체제를 갖추지 못하다가, 원기68년(1983) 7월26일에 이르러 비로소 만덕산훈련원을 준공·개원했다.

원기71년(1986) 11월에는 전주교구 출가교화단에서 만덕산 초선지에 안내표지판을 설치하고 길을 보수 및 확장하며 식수를 개발하는 등 초선지 개발에 대한 결의를 다지고 시행하기로 했다.

원기72년(1987) 5월13일에는 만덕산훈련원 부속건물 신축기공식을 거행했으며, 동년 9월9일 대지 660㎡ 연건평 452㎡ 규모의 콘크리트 2층 현대식 건물의 소법당과 숙소를 갖춘 만덕산훈련원 본관을 건축했다. 아울러 중앙문화원은 만덕산 초선지 비 둘레에 돌난간, 판석 등 추가장엄공사를 완공했다. 대산종사와 남·녀수위단 전원 및 관계요인 다수가 참석한 가운데 준공 축하행사를 가졌다.

미륵사에서 만난 삼타원 최도화

원기7년 변산 봉래정사에서 소태산 대종사는 정산종사에게 "이제 차츰 때가 되어간다. 어디든지 네 발걸음 내키는 대로 가 보아라. 그러면 만나야 할 사람을 만날 것이다. 그러나 전주에는 들리지 말라"고 말했다. 정산종사는 스승의 말씀을 받들어 전주는 눈길도 주지 않았고 가는 도중 미륵사 주지를 만나 그와 함께 만덕산 미륵사를 찾게 됐다. 정산종사는 미륵사 주지와 형제의 의를 맺고, 형이야 아우야 하면서 그 해 겨울 미륵사 일을 봐주며 수행정진을 하게 된다.

이듬해 설이 지나고 미륵사의 화주였던 비단장수가 미륵사를 찾아왔다. 화주는 정산종사를 보고 마음이 쏠려 생불님이라 받들기 시작했는데, 이 화주보살이 삼타원 최도화 대호법이었다. 화주보살의 선전으로 근방에는 '미륵사에 생불님이 오셨다'는 소문이 나기 시작했다. 불공을 올리려 많은 사람들이 미륵사에 몰리기 시작해 빈찰이었던 미륵사는 갑자기 부자절이 됐다.

그러자 정산종사는 '더 이상 머물기 어렵겠다' 생각하고 음력 2월경 소태산 대종사에게 경과보고의 편지를 보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종사의 전갈을 받고 3월경 정산종사는 만덕산 미륵사를 떠나게 됐고 봉래정사로 돌아와 교서초안에 노력했다.

어느 날 화주보살은 정산종사가 매양 단벌옷으로 지내는 것을 안타까이 생각하고 비단솜옷을 준비해 공양하러 미륵사를 찾았다. 그러나 정산종사는 이미 떠나고 없었다. 화주보살은 주지스님이 정산종사를 다른 데로 빼돌렸다고 생각하고, 주지스님은 화주보살이 명안스님(그때 정산종사 불명)을 다른 곳으로 모셔갔다고 크게 싸우기도 했다. 화주보살은 결국 여기저기 묻고 찾아 봉래정사까지 오게 됐고, 더 높은 스승이 있는 것을 보고 소태산 대종사에게 귀의했다. 대종사는 "방죽을 파야 고기가 모인다 더니 과연 모여드는 구나"하며 화주보살에게 도화(道華)라는 법명을 줬다. 최도화는 교단 창립 시기에 박사시화, 장적조와 함께 교단 3대 여걸이라 불렸고, 전북과 서울 지역에 교화의 초석을 다진 인물이다.
▲ 소태산 대종사가 12제자와 함께 첫 선 훈련을 했다.
초선지 만덕암과 초선지 비

원기9년 5월 익산총부가 건설되기 이전, 초선지는 대종사를 비롯 12명의 제자들이 김씨 문중의 산제당을 빌어 교리강습을 가졌던 유서 깊고 교단사적인 사적지이다. 이 산제당은 만덕암이라 불리며 최도화의 인도로 인연이 닿은 곳이다. 지금은 큰 바위에 일원상(一圓相)을 그려 놓았고, 밑에 자리하던 만덕암은 한국전쟁 때 소실돼 터만 남아 있다. 진안군 성수면 중길리 상달마을 골짜기 만덕산 7부 능선에 자리잡고 있으며, 성수면 좌포리의 김승지가 1910년경에 부종병으로 고생하는 며느리를 위해 지어 준 집이었다.

소태산 대종사가 만덕암에 간 것은 원기7년 12월경이었다. 소태산 대종사는 최도화의 주선으로 만덕산 만덕암에 머무르며 이곳에서 진안 지방 교화는 물론 회상창립의 주요 인재를 확보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소태산 대종사가 만덕산에 행가할 때 오창건과 송도성이 수행했고, 만덕암에서 3개월 남짓 머무는 동안 전삼삼 전음광 모자를 만났다. 소태산 대종사는 익산 보광사에서 불법연구회 창립총회를 가진 뒤 며칠 후에 다시 만덕암에 행가했다.

원기9년 5월 소태산 대종사는 정산종사, 오창건, 김광선, 최도화, 전음광, 박사시화, 이청춘, 노덕송옥, 전삼삼, 이동진화, 김삼매화, 김대거 등 12명의 제자와 선을 났고, 이때 선을 주관한 사람은 팔산 김광선 선진이었다.

이를 바탕으로 소태산 대종사는 이듬해인 원기10년 3월에 정기훈련법과 상시훈련법을 제정 발표하고 5월에 새 훈련법에 의해 중앙총부에서 첫 정기훈련법으로 하선과 11월에 동선을 하게 된 것이다. 결국 만덕산에서의 선은 회상의 정식 훈련의 효시가 돼 원불교 초기 공부법을 체계화하는 과정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또한 소태산 주위의 인연 중 초기의 핵심적인 인물들이 참여해 수선했던 것으로 그 의의가 크며 소태산 대종사가 정산종사, 대산종사를 만나 원불교 3대의 종법사의 만남이 최초로 이뤄진 곳이기도 하다.

훗날 대산종사는 "만덕산 초선성지는 갑자년 봄부터 12제자에게 사실적 도덕의 훈련을 첫 시범 보이신 초선성지요, 영광·성주의 몇몇 제자와 전주·진안·서울·남원들의 인연 있는 제자들을 규합하기 시작한 총부건설의 주비지인 성지다"고 말했다.

만덕산 초선을 중심으로 형성된 법문으로는 <정산종사법어> 기연편 4장, <대종경선외록> 교화기연장 1절, <한울안 법문과 일화> 14절, <대산종사법설3집> 신성 81장, <대산종사법설3집>법위 80절 등을 찾아볼 수 있다.

교단 최초 선을 기념하기 위해 원기70년에 만덕산 초선지로 올라가는 만덕산 농원 입구에 비석을 하나 세웠는데 이것이 초선지 비다. 비는 한국 고유의 비석 형태로 거북 좌대에 용의 갓을 씌었으며 비 높이는 좌대로부터 4m이다. 초선지 비의 비문은 다음과 같다.

'여기에서 서(西)로 약 2천보 만덕산 중복(中腹)에 새 회상의 초선지 산제당터가 있다. 원기7년 임술 9월 소태산 대종사 부안 봉래산에서 정산종사를 이 산에 보내시어 진안 전등(傳燈)의 기연 지으시고 그 해 섣달 몸소 내산(來山)하시어 석 달 동안 숙연(宿緣)들을 결속, 새 회상 창립의 주역으로 세우시었다.'
▲ 만덕산훈련원 본관을 완공해 교도들의 정기훈련을 진행하며 11과목 체질화에 앞장서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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