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집은 원래 증산교 집안이었다. 어릴적 배운 증산교 주문을 아직도 잊지 않고 다 외울 정도다. 경상도 경주에서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한의원을 크게 하셨다. 용하다 소문이 나니 증산교도 한 분이 전라도에서 여기까지 할아버지를 교화하러 왔다. 원평교당 뒤에는 당시 보화교 증산도파가 있었는데 나중에 할아버지가 교주를 몇 번 만나시면서 가족 모두가 원평으로 이사오게 됐다.

그런데 어느날 할아버지는 갑자기 혈압으로 열반하시게 된다. 증산교에 전재산 다 바치고, 할아버지도 갑자기 열반하시니 아버지도 홧병으로 5년만에 열반하셨다. 그러다보니 집안이 엉망이 됐다. 나는 가정이 어려워져 고등학교 3학년 중퇴를 해야만 했다.

서울 직장 생활을 하는데 모시는 분이 미국 출장을 가는 바람에 한 달간 모처럼 휴가를 얻게 됐다. 그때 원평에 내려갔는데 친구가 원불교에서 청년회 결성한다고 원평교당으로 초대했다. 그때 진산 강보광 형님을 만났다. 여러 선배들이 많이 있었지만, 강보광 형님이 나의 입교연원이 됐다.

원평교당 청년회 결성이 되고, 교무님은 <원불교교전> 한권을 전해줬다. 읽어보니 '진짜 이러한 종교가 있을 수 있나'하고 충격을 받았다. 쉽지만 지키기 어려운 법문도 있었고, 참회되고 눈물나는 법문도 있었다. 지금까지 아무 생각없이 살아온 내 자신이 창피하기만 했다. 교전을 4일만에 전부 읽어버렸다. 그리고 교당을 매일 다니기 시작했다. 그동안 세상 못 믿으면서, 주먹이면 다 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마음공부하고 설교 들으며 동지들과 함께 한다는 사실은 또다른 세상을 만난 것과 같았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아침에 일어나 운동을 하고 있으면 어느 할아버지 한분이 지팡이 짚고 집 앞을 지나가셨다. 그 뒤에 여러 사람들이 '우~'하고 따라 다녔다. 우리집 앞으로 아침·점심·저녁을 지나다니셨으니 궁금했다. 청년회를 다니고 보니 그 할아버지가 원불교 최고 어른인 대산종법사라는 것을 알게 됐다.

이렇게 청년회 다니는 재미, 대산종법사 모시는 재미로 살다보니 어느새 한달 휴가 기간이 끝났다. 서울에서 올라오라는 연락이 있었는데 안올라가 버렸다. 교당이 너무 재미있어서다. 그리고 마음개조해서 새로운 인생 살아보고 싶었다.

어느날 농타원 이양신 교무가 "도길씨"하고 불렀다. "왜요?", "익산에 원불교 총부가 있는데 살아볼 의향이 있어요?" 전무출신 해볼 의향이 있냐는 것이다. 당시 오희원 공익부장이 착실한 청년을 구해달라고 한 것 같다. "저 같은 사람도 그렇게 될 수 있나요?", "오희원 공익부장님 말씀대로만 하면 되요", "무슨 일 하면 되는데요?", "전무출신들 가운데 아프고 병원에 다녀야 하는 사람들 안내하고 차 운전하는 도우미 역할 하면 되요." 이 말을 듣고 반가웠다. "이렇게 중요하신 분들이 편찮으면 안되죠." 육일대제 끝나고 가면 된다고 했다.

떠나기 전에 이양신 교무는 나에게 '솔성요론 1조'를 외워보라 했다. "사람만 믿지 말고 그 법을 믿을 것이요…." 이양신 교무는 총부에 가서 살더라도 이것만 가슴에 가지고 살아라고 당부했다. 조그만 교당에서 생활했던 것과 총부의 백 여명 교역자가 사는 곳이 다르기 때문에 솔성요론 1조가 신념으로 꽉 박혀야 한다는 것이다. 알았다고 하고 총부에 왔다.

총부에는 당시 다산 김근수 교정원장님과 용타원 서대인 감찰원장님이 주재하실 때였다. 대중앞에서 인사하려니 많이 떨렸다. "원평교당에서 총부에 살러온 고도길입니다"고 인사했다. 총부에서 원광한의원 관리하면서 공익부 근무하면서 왔다갔다 했다. 특히 수도원 원로교무들을 병원에 많이 모시고 다녔다. 여자 전무출신들은 여자교무들이 모셨고, 남자 전무출신들은 내가 모셨다.

/시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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