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화에 대한 무게감 참 낯설고 불편하기도

수행인은 소박한 삶 속에서 행복 찾아가야

교당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이 생겼다. 꽤 여러 해를 기관에서 근무하고 있었다. 내가 하고 있던 일은 내가 간절히 원하던 것이었고, 내가 하는 일이 싫어진 것도 아니었다. 언제부터인지 나이 듦과 함께 비례해서 익어가지 못하는 나의 신앙과 수행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만약 교도수가 많은 교당이라면 원 없이 법을 전하고, 함께 공부할 수 있으니 참으로 행복할 것이다. 공부가 일이니 얼마나 행복하랴.' '혹 교도수가 조촐한 교당이라면, 시간적 여유가 있을 터이니, 그동안 고팠던 수행을 실컷 해 보리라. 욕심 부리지 않는다. 함께 우리의 교법으로 심도 깊게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교도 한둘만 있어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또한 교도들과 늘 공부 이야기를 하고, 자그마한 텃밭이라도 있다면 상추랑 풋고추도 가꾸며 천지의 은혜를 깨알 같이 느껴보리라.

교당에서 살고 싶다는 바람이 모락모락 피어오를 때, 내가 꿈꾸던 교당생활이 시작됐다. 나의 꿈은 참으로 소박한 것이었다. 모든 가능성을 열어놓고 그 나름의 행복의 의미를 부여한 나의 꿈은 이뤄질 수밖에 없고, 어느 곳으로 가든 행복할 것으로 확신했다.

꿈은 이루어졌다. 교도 숫자는 조촐했지만, 심도 있게 공부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교도들도 있었다. 작은 텃밭이 있어 여름엔 끊임없이 열리는 풋고추를 원 없이 따먹을 수도 있었다. 밥상을 차리다가도 슬리퍼를 신고 문밖에만 나서면 되었다. 싱싱하고 연한 풋고추를 골라 따다 보면 어느새 입에 침이 고였다. 법회 후 점심공양을 한 후 교도들과 함께 이야기하고, 웃다보면 이것이 교당생활의 행복이지 싶었다.

그런데 항상 행복할 수는 없었다. 때론 자다가 깨어 다시 잠들기 힘든 상황이 한동안 계속 되기도 했다. 그동안 잠이란 원치 않을 때조차도 끈질기게 나를 따라 다니던 존재였다. 때문에 시도 때도 없이 찾아와 나를 잠 못 들게 하는 교화에 대한 무게감은 참 낯설고 불편했다. 내가 얼마나 오만했던가.

교화 텃밭에 나온 지 2년째 접어들었다. "대중 가운데 처하여 비록 특별한 선과 특별한 기술은 없다 할지라도 오래 평범을 지키면서 꾸준한 공을 쌓는 사람은 특별한 인물이니, 그가 도리어 큰 성공을 보게 되리라.(<대종경> 요훈품 40장)" 근래에 나를 참 많이 다독여 주는 법문이다.

이제는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할 수 있는 만큼 해가며 스스로 희망을 발견해 가고 있는 중이다. 이제 자다가 깨도 금방 다시 잠들 수 있고, 부담감에서도 조금은 자유로워졌다. 내가 아무리 교화를 잘하고 싶다 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정도에서만 되는 것이다. 그 정도에서 최선만 다하자.

그리고 편안한 마음으로 교화하기 위해선 법회 출석수 증가와 교화성장을 동일시하는 생각을 바꾸자. 원불교에 호감을 느끼게 하고 원불교가 있음을 알리고, 언젠가 한 번 가볼 마음의 씨앗 하나 심어주는 것도 교화다. 그래서 가능하면 정복을 입고 외출했고, 아침이면 교당 주변을 쓸었다.

하지만 다른 때보다 많은 교도들과 함께 법회를 볼 때면, 내안에서 슬금슬금 솟아나는 희망과 기분 좋은 에너지는 어쩔 수가 없었다. 교화는 하는 것이 아니라 되어지는 것이다.

오래된 기억 속에서 내 조급증의 처방전이 된 스승님의 말씀이 화두처럼 던져졌다.

나는 일분일초도 멈추지 않고 베풀어 주는 법신불 사은의 은혜를 얼마나 잊지 않고 있는가. 그 은혜로 얼마나 행복해 하는가. 감출 수 없는 수행과 실천의 향기는 주변을 얼마나 향기롭게 하고 있는가. 누군가의 아픔과 어려움에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하고 있는가. 내 아픔과 어려움과 비교해서 과연 조금도 덜하지 않은가. 기도의 응답을 들을 마음의 준비는 얼마나 되었는가. 내 삶의 문제는 해결이 되었는가. 타인의 삶의 문제에 바른 길을 제시해 줄 만큼 지혜를 갖추었는가. 이 질문들이 새로운 나의 꿈이 되었다.

꿈이 이루어진다면, 나는 소박한 삶 속에서 스스로 행복할 수 있는 힘 있는 수행인이다. 크게 잘난 것 없어 보이는데, 신기하게도 사람들은 나를 찾아 위안을 얻는다. 짊어진 삶의 무게가 버거울 때 문득 내가 생각나고, 그 무게는 나를 만나 새털같이 가벼워진다. 다시 살아갈 용기도 생긴다. 이런 나와 재가출가 교도가 많아지면 원불교는 모두가 찾고 싶은 종교가 될 것이다. 교화가 절로 된다.

/토성교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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