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종경 공부

▲ 장오성 교무/송도교당
사원의 탑을 많이 돌면 다음생에 극락 간다고 무슨무슨 시즌이 되면 합장하고 탑돌이 하는 행렬들이 있다. 어디쯤 있는지도 모를 극락을, 그것도 죽어야 간다는데 그리들 정성을 들인다. 진짜 탑과 극락을 코앞에 두고 말이다.

탑은 사찰의 뜰에만 있지 않다. 유정무정의 모든 형상있는 것들은 생성될때 탑 하나씩을 가지고 온다. 나와 똑같이 생긴 인형의 탑도 여기 있다. 그 인형 탑을 하루종일 데리고 다니며 관리하는 주인공은 어딘가에 따로 있다. 인형 탑은 백년이 못가 고장나고 무너지며 결국 흩어지지만 주인공은 탑의 생성, 사라짐에 무관하게 영겁으로 여여하다. 그 보이지 않는 탑의 주인공 찾기가 '인형 탑돌이'의 관건이다.

보통은, 탑의 주인공이 각각 따로 탑마다 그 '안에 있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다. '안에 있는' 주인공이 '밖을 보고 있다'고 말이다. 그게 바로 문제다. 무명, 어리석음이며, 완전한 착각이다. 그 주인공은 탑 안에 있다기보다 차라리 밖에 있다는 게 더 적실하다. 탑안에 갇혀서는 결코 실재의 주인공을 만날 수가 없다!

몸 자체는 무정물이며, 몸의 재료는 사찰의 탑과 동일하다. 지수화풍이다. 지수화풍은 각각 본질이 텅 빈 공(空)이다. 일체의 탑은 '존재처럼' 착시될 뿐, 다 텅 빈 허공이다. 진실로 텅 비어있다. 테두리도 없다. 본래 공한 인형 탑을 형체없는 주인공이 유상(有常)으로 여여자연하게 경영한다. 아무리 많은 지수화풍의 탑이 생기고 사라져도 주인공은 하나다. 일체의 탑이 다 주인공 안에 있고, 한 주인공의 소유다. 거부장자다.

주인공은 한시도 탑을 떠난 적이 없고 탑도 주인공을 벗어나 존재한 적이 없다. 아무리 자르려 해도 불가능이다. 이탑 저탑, 이 인형 저 인형을 억지로 나눠, 탑 안에 스스로 가둬두고 답답함과 고통을 매일매일 진수성찬 뚝딱 차려내는 것이 중생의 재능이다. 업장이다. 허공을 어찌 나눌수가 있는가. 낱낱이 나뉘어 따로 있다는 그 망상만 탁 놓으면 여여히 허공에 편만한 하나의 주인공이 나타난다.

우주가 사원의 뜰이며 일체만물이 탑이다. 주인공은 허공이다. 일체만물을 주인공이 만들고 움직이며 거두어들인다. 인형을 움직이게 하는 보이지 않는 주인공을 찾아 주인공으로 사는 것이 이생을 받아 온 사명이다. 하루종일 수십킬로그램에 달하는 이 인형을 데리고 다니는 주인공을 찾는 이것이 탑돌이다. 이 '참 탑돌이'라야 어느날 주인공이 형체없는 진짜 형체를 드러내 준다.

육근 작용마다 주인공이 잘 살펴 경영하니 그 결과는 어떨까? 무량한 은혜·감사·지혜·일체의 복 등등이 넘쳐흐른다. 다시 말하지만, 주인공이 가진 것이라곤 전지전능 자유자재 극락생활 뭐 그 정도.
추운날 탑돌이로 수고로운 이들이여! 지금 이순간 그 인형탑 운전하는 주인 만나 육근작용 살피는 탑돌이 하면 즉각 극락성취라오.

일체 병을 낫게 해줄 만병통치약, 명의가 나 여기있다 손 흔들며 돌아봐달라는데 당최 거들떠보려고도 않고 행여 죽어서 갈 극락행 티켓 놓칠세라 어지러이 탑만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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