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상 작가/북일교당
아침에 눈을 뜨면 곧장 기도실로 올라간다. 두 개의 양초에 불을 밝히고 잠시 숨을 고른 뒤에 목채를 들고 좌종을 친다. 잠들어 있는 집안의 고요를 흔들며 종소리는 나직하게 퍼져 나간다. 목채로 종을 한 번 치면 텅 빈 공간을 울리며 종소리가 나와 퍼져나가는데 대략 칠팔 초의 길이가 된다. 칠팔 초 길이의 종소리에 내 영혼은 적막해진다. 그렇게 열 번을 치고 난 뒤에 영주와 청정주를 암송하고 일원상서원문과 반야심경을 독경한다.

기분이 좀 더 내키면 일원상 앞에 있는 〈대종경〉을 읽기도 하고, 육체가 버겁다고 느끼면 108배를 하기도 한다. 어떤 날은 기도실에 가기 싫어 침대에서 한없이 미적거리기도 한다. 좌종을 치는 것으로 시작하여 청정주로 끝맺기까지 삼십 여분의 시간이 소요되는데, 그 시간만큼 더 자고 싶은 유혹 때문에 기도실에 올라가기 싫을 때가 많다. 그래서 가끔 빼먹기도 한다. 그러나 우리집에서는 대부분의 아침을 좌종의 종소리로 연다.

어떤 날은 좌종을 스무 번쯤 치기도 한다. 종소리가 소멸되기 전에 다시 종을 두드리면 맑고 가벼운 소리가 바람처럼 내 영혼을 건드린다. 이어 집의 구석구석까지 파고들어 집안 곳곳에 청정한 기운을 불어넣어준다. 그 소리 속에 앉아 있으면 색신(色身)인 내가 조금씩 공(空)해진다. 내 몸이 공해지는 것이 아니라 내 마음의 욕망, 그 색이 공해지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아침이 평화로운 것은 아니다. 마음이 엉망인 아침도 있다. 그 아침의 종소리는 가시처럼 날카롭고 칼날처럼 예리하게 마음을 찌르고 벤다. 명상은 사라지고 마음은 뒤엉킨다. 좌종소리는 마음에 따라 순간순간 달라진다.

종류를 불문하고 지상에 존재하는 모든 종은 공(空)에 기원을 두고 있다. 종의 가운데가 비어 있지 않으면 소리가 종 밖으로 퍼지지 못한다. 종루에 매달려 있는 큰 종도 속은 비어 있으며 심지어 종과 마주한 땅에도 항아리 같은 것을 묻어 공명이 일어나게 만들어 두었다. 종뿐만이 아니다. 목어(木魚)의 속도 비어있다. 비어 있지 않으면 소리가 만들어지지 않는다. 오래 전에 읽었던 책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었다.

종소리가 들려왔다. 부처님께서 묻는다. "이 종소리가 어디서 나느냐?" 아난다는 대답했다. "종에서 납니다." "그럼 종을 치는 방망이가 없어도 종소리가 나겠느냐?" "아, 종소리는 방망이에서 납니다." "방망이에서? 흠, 그럼 아무리 종소리가 났다 하더라도 사람에게 듣는 귀가 없다면 그래도 소리가 나겠느냐?" "아! 종소리는 귀에서 납니다." "귀로 종소리를 들었다 할지라도 이것이 종소리라고 분별하는 생각이 없다면 어떻게 되겠느냐?" "그렇습니다. 생각이 없다면 들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종소리는 생각에서 납니다." "그러면 그 생각은 어디에 매여 있느냐?" "마음에 있습니다." "그러면 마음이 있느냐 없느냐? 있다면 어디에 마음이 있느냐? 아난다가 마음을 찾아보았다. 그러나 마음은 실체가 없었다. (유응오·장세훈 엮음, <벽안출가>, 샘터, 2008년 11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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