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설위원 칼럼

▲ 여도언 교도/해운대교당
자숙하는 자세 보여주는 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
도덕세계의 기초, 다시 세워야 하는 대업



죄 지은 사람은 죗값을 받아야 한다. 이 당연한 이야기가 요즘은 자명성을 잃어가고 있다. 사람과 사람, 욕망과 욕망이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회는 규범이 필요하다. 공정하게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서는 비리를 저지르고, 남을 해코지하면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아야 하는 당위성이 그래서 요구된다. 이 약속이 엄정히 지켜지지 않으면 더 많은 손해를 보는 계층은 사회 약자들이다. 이 때문에 위법에 대한 처벌은 정의 실현을 위해 반드시 시행돼야 한다.

죄 지은 사람이 처벌을 앞두고 "내가 왜?" "나만 왜?" 하며 의뭉을 떨며 대드는 풍경이 요즘 화제다. 더욱이 죄 지은 것이 분명하다고 대다수 국민이 동의하는데도 불구하고 그 죄를 결단코 부정한다. 되레 고개를 치켜들고 여론을 질타하는 목소리를 낸다. TV와 신문이 연일 그의 범죄 혐의를 수없이 보도하고 있는데도 부끄러운 기색조차 없다. 뉘우치는 조짐은 없고 태도는 당당하다. 왜 이럴까. 법정에서 판결이 날 때까지는 무죄 추정의 원칙은 있다. 그래도 자숙하는 자세를 보여주는 것이 국민에 대한 도리가 아닌가.

그에게 왜 수치심이 없을까. 불의에 둔감한 한 개인의 천성 때문일까. 위법을 하고도 당당한 것은 한 개인의 도덕적 미성숙으로만 단정할 수 있을까. 아니면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는 도덕적 문화적 저급성의 한 단면일 뿐일까. 그의 죄를 묻는 우리는 책임이 조금도 없는 걸까.

남을 배려해본 적이 없는 사람은 베푸는 일을 잘 하지 못한다. 슬픔에 잠긴 이웃을 보듬고 대화를 해본 경험이 없으면 악어의 눈물을 흘리게 된다. 삶이 힘든 이에게 따뜻한 손길을 내밀고 그의 가슴을 안아 본 사람이 아니면 봉공심을 펼 수가 없다. 은혜를 알지 못하면 시혜는 난망이다. 결국 사욕(私慾)만 남고 이타(利他)는 찾아 볼 수가 없게 된다.

국가 미래보다 건설업체를 위한 행정을 편 정부 부처는 없었는가. 병사의 생명보다 방산기업 보호에 우선순위를 둔 국방정책은 없었는가. 내 공동체에 득이 되면 이웃 동네는 피해보아도 괜찮다는 님비(NIMBY)심보는 없었는가. 산재노동자의 죽음을 원수 대하듯 한 기업은 없었는가. 비정규직 노동자의 처우를 나몰라 하는 노동조합은 없었는가. 교사들의 의견이 죽어 있는 교무실을 만든 학교는 없었는가. 애달픈 죽음 앞에서 애도의 마음을 팽개친 적은 없었는가. 나에게 이익 되면 정의에 어긋나도 불문곡직 일처리를 해주지 않았는가.

비를 들고 청소하지 않으려 하면서 깨끗한 골목길을 걷고 싶어 하는 희망은 허욕이고 위선이다. 뒷짐진 채 청결한 골목길을 요구하는 짓은 얼마나 허망한가. 정직하지 못하면 쫓겨나고 내쳐지는 것이 세상 이치다. 사회 구성원들이 정의로워야 패쓰는 무리가 발붙이지 못한다.

사람의 가치는 품성에 있다. 품성이 초라한 사람은 멋진 가면을 씌워서 자신을 보여주려 한다. 본색은 결코 숨길 수가 없다. 공존, 정의, 합력, 배려보다 사욕이 만연한 사회에서는 책임지기보다 변명이 앞서 나오기 마련이다. 참회하기보다 "모두가 도둑인데 나만 갖고 왜 그래?" 하는 목불인견의 광경이 나오는 것은 당연하다 하겠다.

세상이 상식대로 돌아가고 있다면 우리는 용서를 이야기할 수 있다. 크게 어긋남이 없이 나아가고 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다. 적당히 문제가 있고 적당히 상처가 있는 것이 세상사 아니던가. 지금은 그러나 용서라는 단어를 꺼내기는 힘들어 보인다. 죄 지은 이를 미워해서가 아니다. 도덕세계의 기초를 다시 세워야 하는 대업이 우리 코앞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용서는 차후다. 휘어진 자를 바르게 하려면 휘어진 반대쪽으로 더 큰 힘이 가해져야 한다.

탐욕의 세상을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그렇지만 우리가 지독한 탐욕은 결단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의지를 단호히 보여줄 필요가 있다. 불법과 탈법이 처벌되기도 전에 미리 용서되고 없던 일로 치부된다면 정의와 도덕이 풍미하는 사회건설은 어불성설이다. 섣부른 용서보다는 엄정한 처벌이 공동선을 이루어 가는 이정표가 된다. 도덕이 조금씩 무너져 그 낌새를 알지 못하는 미혹한 상황보다 왕창 무너진 오늘이 우리에게 주어진 도덕성 회복의 호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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