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기19년 제1회 은법회에서 대종사가 은자녀들과 기념 촬영했다.
▲ 나세윤 교무/원불교사진협회장
교사(敎史)에서 사진의 역할은 매우 컸다. 교단은 사진이라는 신문물에 일찍 눈을 떴고, 후손들에게 당시의 역사를 남기려는 의지도 상당했다. 그래서 사진 곳곳이 연출되거나 의도적으로 찍은 사진들이 많다. 문자가 기록하는 역사라면, 사진은 보여주는 역동성이 있다. 상상이 아닌 현실을 입체적으로 만들어 놓은 것이 사진인 것이다.

소태산 대종사가 새회상 창립을 위해 삭발한 사진(원기9년)은 만덕산 초선지에서 12제자를 훈련시키고, 하산해 찍었다. 사진은 30대 중반의 대종사가 전방을 주시하며 흰 두루마기를 입고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이다. 사진으로 만나는 대종사는 민자연화의 큰 딸인 이성각이 올린 도복 입은 진영(원기10년), 이공주가 올린 외투를 입고 찍은 사진·좌정한 진영(원기12년), 검은 두루마기를 입은 진영(원기13, 14년), 서울에서 촬영한 진영(원기16년), <육대요령>에 실린 진영(원기17년), <삼대요령>에 실린 진영, 황정신행이 올린 털외투를 입은 진영(원기22년) 기타 일제의 강권에 의해 일본 방문을 준비할 때 국민복을 입은 진영 등 다양한 연출과 실내촬영으로 부처님의 자비를 느낄 수 있다.

대종사가 제자들과 더불어 공동체 생활했던 익산성지의 사진은 주로 단체사진이 중심이다. 원기13년(1928) 5월16일 창립 제1회를 기념하고, 신축강당(현 종법원)을 배경으로 찍은 사진을 비롯해 봉래정사 수양 당시 시봉진들과 뒤늦게 찍은 사진(원기13년), 병인동선(원기12년 3월) 남자부 기념사진, 정묘동선 기념사진(원기13년), 첫 번째 조실이었던 금강원에서 찍은 단체 사진(무진동선 원기14년)이 사진첩에 보인다.

또 새로 지은 공회당을 뒷 배경으로 찍은 사진(기사동선 원기15년) 그리고 경오동선(원기16년), 신미동선(원기17년), 계유동선(원기19년), 갑술동선(원기20년), 경성지부 하선(원기20년), 영산학원 을해동선(원기21년), 병자·임신·무인동선, 제1회 은법회 기념사진, 대종사 대각 20돌을 맞아 완공한 대각전을 배경으로 한 단체사진 등이 생생한 역사로 살아있다. 항상 사진 중앙에는 소태산 대종사가 자리에 앉아 있거나 서 있다.

경사스런 일이나 슬픈 일에도 역사를 사진으로 남겼다. 대종사 장남 박광전의 대각전 결혼사진, 유성렬의 결혼식부터 총회기념 지방대항 강연대회, 남부민회관 건축기념 사진 등 기쁨이 가득했던 사진이 있는가 하면 도산 이동안 선진 열반 추도식장, 도산 유족들과 찍은 사진 등은 교단사적 아픔을 표현했다. 대종사의 열반 사진은 기록자로서 의식이 돋보인 장면이다. 열반에 든 대종사를 종법원에 모신 사진, 일경의 삼엄한 경계 속에 230명만 장의행렬에 참가할 수밖에 없었던 현장 사진, 불법연구회창조 소태산일원대종사님 열반표기, 영여(靈輿), 금강리 수도산 화장막, 다비식 후 종법원에 유해를 안치하는 장면, 생화와 조화로 장엄한 대종사 영결식장 등은 어떤 역사 서술보다도 위대한 장면이 담겨져 있다.

사진의 힘은 그런 것이다. 모든 의미를 한 장의 사진에 담아내고, 그것으로 순간을 영원으로 만드는 것이다. 이런 기록자들로 혜산 전음광, 묵산 박창기 등 선진들의 활약은 빼놓을 수 없는 장면들이다. 교단 최초의 카메라맨이었던 전음광 선진은 벽장을 현상실로 만들어 1개월간 실습을 하기도 했고, 생전에 3대의 카메라를 갖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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