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상 작가/북일교당
죽비는 일반적으로 불가에서 어떤 신호를 할 때 쓰는 도구이다. 법회를 시작할 때, 법회가 끝날 때, 혹은 법회의 순서를 바꿀 때 죽비를 쳐서 신호를 보낸다. 신호를 보내는 측면에서 보자면 굳이 죽비를 사용할 이유는 없다. 죽비를 치는 것이 본질이 아니라 순서가 바뀌거나 어떤 행위의 시작과 끝을 알리는 신호가 본질이기 때문이다. 죽비 대신에 호루라기나 나팔을 사용해도 본질이 바뀌지는 않는다. 피아노로 대신해도 이상할 것이 전혀 없다. 1989년 봄날의 토요일이었다.

그 날 〈소태산 평전〉의 작가 김형수와 함께 광주에 있었는데 영화 '아제아제 바라아제'를 함께 보았다. 그 영화에서 죽비를 처음 보았다. 비구니들이 좌선을 하는 장면에서 스님이 들고 있는 긴 죽비가 눈에 들어왔다. 스님은 선을 하다가 졸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죽비로 그 수행자의 어깨를 살짝 내리쳤다. 죽비를 맞자 수행자가 흠칫 놀라서 깨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어떤 수행자는 졸다가 죽비를 맞자 "씨×, 왜 지랄이야!"라고 소리치기도 했다. 영화 속의 그 죽비가 내가 처음 만난 죽비였다. 죽비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문관〉 제43칙의 '수산죽비'다.'본칙:수산(首山) 화상이 죽비를 들어 대중에게 보이며 말한다. "이것을 죽비라 부르면 이름에 걸린다(觸). 죽비라 부르지 않으면 사실에 어긋난다(背). 말해보라. 뭐라고 부르겠느냐?" 평어 : 무문이 말한다. 죽비라 부르면 이름에 걸린다. 죽비라 부르지 않으면 사실에 어긋난다. 말을 해도(有語) 안 되고, 침묵해도(無語) 안 된다. 빨리 말하라, 빨리 말하라. 송 : 죽비를 들어 살리고 죽이는 명령을 내린다. 어긋남(背)과 걸림(觸)으로 번갈아 몰아치면 불조(佛祖)도 목숨을 구걸해야 한다. (장휘옥·김사업 제창, 〈무문관참구〉, 민족사, 2012년, 347, 349, 350쪽)'

어떤 대답을 해야 하는가? 부처를 만나면 부처를 죽이고 조사를 만나면 조사를 죽여야 참 자유를 얻는다. 원불교로 눈을 돌리면 소태산을 만나면 소태산을 죽이고 종법사를 만나면 종법사를 죽여야 비로소 자유를 얻을 수 있다. 자유를 얻어야 화장실의 구더기까지도 살려내어 새 생명으로 빛나게 할 수 있다. 소태산을 만났을 때 머뭇거리거나 종법사를 만났을 때 머뭇거리고 있으면, 그의 길은 이미 닫힌 것이다. 그에겐 자유가 없는 것이다. 자유가 없으면 새로운 길을 열지 못한다. 옛길에서 그저 서성거릴 뿐이다. 자, 어떻게 할 것인가? 본칙의 질문에 대해 무문선사는 대답을 재촉한다. 나는 누구도 죽이지 못하고 그들의 그림자만 밟고 있을 뿐이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어떤 꼬마한테서 그 대답을 들었다. "남을 살피느니 차라리 스스로를 살피고, 남에 대해 듣기보다 오히려 스스로에 대해 들으라."

조선 정조 시절의 실학자인 위백규(1727~1798)가 열 살에 지었다는 좌우명이다. 수산죽비의 질문에 대한 충분한 대답이 되지는 않겠지만 작은 방편 하나는 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도 나는 나를 얼마나 살필 것이며, 스스로에 대해 얼마나 들을 것인가? 봄바람이 아직은 차고 매워 내 마음이 설웁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