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공현 교무/은덕문화원

양분된 탄핵정국을 끝낼 시간

다시 무아봉공의 건국론이다


탄핵정국은 한국사회의 다양한 가치관을 부각시키고 있다. 우리사회의 복잡다단했던 역사적 단면들을 총체적으로 투영시킨 모습이다. 시작은 박근혜 대통령의 국민주권주의와 법치주의의 위반, 권리남용, 국민의 생명권보호위반이라는 구체적인 탄핵사안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대한민국 구성원간의 판단과 선택의 괴리감이 반목과 갈등으로 분열되는 조짐이다. 설상가상으로 우리는 성주성지의 사드배치 강행사태까지 경험했다. 우리의 선한 생각과 반목되는 통제 불능의 무서운 현실에 직면한 것이다. 몇 달. 몇 년. 다음 세기에 우리는 의도치 못한 커다란 위험을 맞이할 것 같아 걱정이다. 국제사회가 국가의 이권 앞에 복잡다단한 가치양식으로 우리의 삶을 속도감 있게 엮어 짜는데 우리는 그에 대응하기에 턱없이 무기력한 느낌이다. 우리가 처한 현실이 과연 도덕적 판단과 행동의 변수를 도출할 수 있을 것인가? 바로 이 질문에 앞으로의 국운이 걸려 있다.

이러한 국론분열의 고통은 전 세계적인 추세다. 지난해 6월, 영국은 유럽연합(EU) 잔류를 묻는 투표를 앞두고 현역의원 살해사건이 벌어졌다. 자기와의 의견불일치에 대한 저항수단이 극단적이다. 그런가하면 남미브라질에서도 한국과 비슷한 상황에서 부정부패 혐의로 대통령이 탄핵되었다. 그러나 그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탄핵이후의 정국이 수습되고 있지 않다. 지금 한국사회의 탄핵정국을 접하며 불안이 겹쳐지는 까닭이다. 보통 불안은 두려움을 낳고, 두려움은 분노로 이어지며, 분노는 폭력을 잉태하고 폭력은 대량살상무기와 결합하여 무서운 우리의 현실이 된다. 개인이든 조직이든 함께 살아갈 하나밖에 없는 나라의 운명 앞에 응변창신(應變創新)의 정신으로 화합 단결해야 하는 이유다.

"원불교는 평화입니다." 그동안 우리가 외친 슬로건은 오늘의 상황에 더 절실하다. 평화는 역설이다. 끝없이 타협하고 양보하라 한다. 반면 전쟁과 폭력은 국가의 정당방위나 애국심이라는 정체성을 감각적으로 강조해왔다. 20세기에만 1억명이 넘는 사람이 전쟁에서 목숨을 잃었다. 너무도 쉽게 인권을 유린하고 편 가르기를 선동해 한없이 비극적이고 파괴적인 공멸을 부르는 분단사회. 이런 끔찍한 사회의 전조는 의견이 같은사람만 상대하는 성향이 강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다른 목소리는 철저히 걸러낸다. 자기의견을 널리 알리려는 움직임은 언론의 주목을 폭력적이며 극단적으로 끌고 간다. 갈등은 뉴스가 되지만 화해는 뉴스가 되지 못하는 혼돈과 원망이 가득한 사회다. 그 사회는 분열과 갈등으로 잠식되고 만다. 그래서 평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이 '우리들만의 평화'로 그치지 않도록, 강력한 전통으로 우뚝 서야 하는 이유다.

원불교는 현시국의 혼돈을 종식시킬 정산종사의 '건국론'이라는 해독제가 있다. 8.15해방 후, 좌파와 우파로 크게 양분되는 한국사회에 던진 비책이었다. 그 효과를 거두기 위해서는 중도주의에 입각한 무아봉공의 정신이 필요하다. 개인이나 국가나 모든 마찰과 불화는 개인주의나 이기주의에 입각한 자유방종에서부터 시작된다. 그래서 지난 100여 일간 선의의 촛불들이 폭력과 불법에 선 그으며 고귀한 국민정신으로 지켜내고자 했던 것이다. 오늘의 위정자들은 이점을 명심해야 한다. 왜냐하면 이제 우리는 법치국가의 반열에서 대선정국의 새 역사를 써야하는 중차대한 시점에 서 있기 때문이다. 태극기의 순수와 촛불의 정의를 개인적 욕망으로 오염시키는 역사적 과오를 미래세대에 남겨서는 안 된다. 오늘의 우리는 무아봉공의 정신으로써 근본을 삼고, 정치와 교육으로써 줄기를 삼고, 국방 건설 경제로써 가지와 잎을 삼고, 진화의 도로써 그 결과를 얻어서 뿌리 깊은 국력배양에 일치단결해야 한다. 국론화합을 이끌어내는 진리불공과 법치국가를 실현해내는 실지불공에 총력을 기울여 모두가 매진할 때다. 우리에게는 평화의 성자 정산종사의 DNA가 있다. 정산종사는 국내단결이 있은 후에 국제신용과 외교성공, 그리고 국가주권이 세워져 평등과 자유를 실현할 수 있다고 하셨다. 우리 모두 더 적극적으로 선(善)을 장려하고 공(公)을 대우하며 이 나라를 정신의 지도국 도덕의 부모국으로 성장시키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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