총부 오기 전 정토를 만나 결혼했는데, 공익부에서 남자요양원 방 한 칸을 내줘 함께 살았다. 당시 한 달 용금이 8만원이었다. 그 돈으로는 애들을 가르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생활고에 시달리기까지 했다. 정토도 자존심이 강해서 친정에 손벌리기 싫어했다.

언젠가 출근하는데 아침에 라면이 나왔다. "아침에 라면이 뭐냐"며 정토와 싸웠다. 정토는 울면서 "쌀이 다 떨어졌다"고 말했다. 오늘 아침 남편에게 라면을 끊여 내놓기까지 정토 본인은 매끼를 라면 하나로 버틴 것이다. 마음이 참 무거웠다.

어느 날 밤에 깊은 잠을 들기 어려웠다.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꼭 영(靈)이나 귀신이 내려다보는 것 같았다. 불을 켜면 비몽사몽간에 이상한 것들이 보였다. 내가 자꾸 그러니까 정토도 답답했는지 "당신이 이 법 좋아 살자고 해서 살고 있지만, 생활이 어렵다. 일단 먹고 살아야 할 것 아니냐. 어디 나가서 5년간 바짝 벌어서 오자"고 했다. 나는 "그런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라"고 잘라버렸다. 그리고 나서 며칠 있다가 애기가 너무 아팠다. 밤새 보채고 병원에 데려가려고 해도 돈이 없는데 어떻개 해야 할지 막막했다. 그래서 정토에게 "내가 내일 사무실에 나가면 이야기하고 나가는 것으로 하자"고 말했다. 그런데 그 날 저녁 내가 오히려 죽도록 아팠다.

그날 밤 고통은 정말 죽을 것 같았다. 칼로 살을 도려내는 것 같았고, 머리가 깨질 것 같았다. 가슴도 창으로 찌르는 것 같아 몹시 견디기 어려웠다. 새벽 2시쯤 되었을 때다. 나는 '이렇게 사람이 죽는가보다'는 생각이 들었다. 혓바닥은 말려들어가고 손발은 뻣뻣해져 갔다. 정토가 보다못해 새벽에 도움을 청하러 갔다. 그 때 남자요양원에 쉬시던 좌산 상사님이 '뭔 일이냐'며 달려오셨다. 나중에 알았는데 요양원에 있는 3~4명의 교무를 더 불러 모두 팔다리를 주무르고 수지침으로 기혈을 통하게 하는 등 새벽 4시30분까지 응급처지하느라 진땀을 뺐다고 들었다. 나는 '이렇게 죽는가보다'하고 죽는 줄 알았는데, 정토가 "이제 정신차리겠어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다음날도 몸은 계속 아팠다. 원광대학교병원에서 진찰을 받아도 무슨 병인지 잡히지 않았다. 정신신경과까지 가도 아무 이상이 없다고 하고 약만 주었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뒤부터 영이 보이기 시작했다. 정토는 내가 의식이 없는 상태에서 헛소리 하면서 '아무개가 온다'고 하면 정확히 누가 왔다고 그랬다. 그런 내가 걱정이 됐는지 정토는 무당을 찾았다. 무당은 '신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시들시들하며 계속 안 좋아진 지 한 달이 넘었다. 그때 좌산상사가 정토에게 "그 동안 상황을 이야기해 보라"고 물어오셨다. 정토가 이런저런 있었던 일을 모두 말씀드리니 "내가 영모전에 흥산 박진흥 순교감과 연결해줄 테니 재를 지내보라. 그리고 약을 지어줄 테니까 먹어봐라"고 했다. 좌산상사가 지어준 사상방(四象方) 약을 먹으니, 3재부터는 몸이 가뿐해지고 아프지 않았다.

49재 때는 수도원 어르신들이 많이 참석해주셨다. 당시에 훈타원 양도신 종사가 어떤 분인지 몰랐다. 그런데 49재 지내는 날에 훈타원 종사께서 "니가 도길이냐? 내가 보니까 영가들이 애들 소풍 가듯이 다 가더라. 앞날이 잘 될 것이다"고 말씀해주셨다. 나는 그냥 "예"하고 대답했다.

생활고가 힘들다고 그때 만약 정토랑 나갔다면 분명 죽었을 것이고, 다시는 원불교에 못 왔을 것이다. 교단에서 밑바닥부터 열심히 일하라고 진리가 붙잡아 준게 아닌가 생각이 들었다. 49재 이후 정토도 마음을 돌렸다. 총부 어른들도 "남자요양원 차고를 구멍가게 내서 해봐라"고 공사로 결정해 줘서 구멍가게를 시작할 수 있었다. 생활고가 조금씩 풀렸다.

/시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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