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원익선 교무/원광대학교
과학에서 말하는 법칙은 한 때의 진리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을 절대화하는 것은 맹목적이다. 토머스 쿤이 현재의 과학적 진리가 후대의 과학에 의해 새롭게 극복된다고 한 패러다임 이론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그렇다면 종교에서 말하는 진리는 무엇인가. 그것은 참된 이치나 도리를 의미한다. 소태산이 자수자각한 일원상의 진리가 여기에 해당한다. 언어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이다.

〈장자〉에서 윤편(輪扁, 수레바퀴를 깎는 편이라는 사람)이 대청 위에서 경전을 읽고 있는 제나라의 환공에게, 그것은 옛사람의 찌꺼기라고 한 말은 여기에 들어맞는다. 수레의 핵심인 굴대가 바퀴에 적절하게 들어맞도록 깎는 기술을 자식에게 가르쳐주어도 체득하지 못해 늙어서도 그 일을 여전히 하고 있다. 하물며 예전 성현의 말씀은 두말할 나위가 없지 않느냐는 그의 반문은 이것을 잘 보여준다. 불교에서 진제인 진리를 드러내는 언어를 방편인 속제로 보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진제는 자신을 변화시킨 깨달음이라는 체험이 동반되는 동시에 실제로 지혜와 복이 쏟아지는 불보살의 현실적 행으로 나타나야 한다.

이처럼 언어와 형상 너머의 세계를 보게 된 간디는 자서전에서 "신이 진리라고 믿었지만, 깨닫고 나서는 진리가 신임을 알게 되었다"고 한다. 수천 년 동안 믿어온 우상 숭배의 허실을 분명하게 깨달은 것이다. 왜 진리가 일원상의 상징으로 표현되어야 하는가를 간디가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우상화된 세계의 수많은 신은, 진리를 자기 나름의 수준으로 이해하던 인간의 상상으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렇지만 옛날에도 어리석은 인간에 대한 깊은 신뢰는 있었다. 맹자가 본성에서 우러나온다고 보는 사단칠정(四端七情)이 여기에 해당한다. 예를 들어, 이 중에 인(仁)은 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에서 나온다고 보았다. 도둑질을 하러가던 도둑이 우물에 빠지려는 아기를 보았을 때, 먼저 구하고 간다고 하는 이야기는 인간의 마음이 선하다는 점이 전제되어 있다. 물론 실제 그런지는 여러 도둑의 행위를 살펴보고 판단을 내릴 필요가 있다. 그 이유는 인간은 선악의 양면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순자가 성악설을 주장한 것은 이 때문이다. 결국 선악은 무선무악한 본성을 어떻게 쓰느냐에 달려있다. 따라서 세상이 행복하고 평화로워지기 위해 자비심을 내야한다는 것은 진실이다. 이미 정토경전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처럼, 중생구제의 서원을 조건으로 아미타라는 부처가 된 법장비구의 종교적 행위는 이를 증명한다.

불생불멸과 인과보응의 진리적 속성은 물론, 사은에 보은해야 한다거나 정의를 구현해야 한다는 당위성, 물질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거나 양심을 속여서는 안 된다는 삶의 윤리 등은 일원상 진리가 현실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가 하는 것을 보여주는 실천적 교의인 것이다.

결국 진리적 종교는 유병덕이 "모든 사람을 신앙케 하는 동시에 사실적 도덕을 훈련함으로써 희생적 정열을 지니고, 모든 생명을 살려보려는 정의로운 인간상, 용기있는 실천인상, 순일한 참인간상을 창조하려는 것"이라고 한 것처럼 만법을 회통하면서 도덕사회주의 건설을 위해 자비로운 부처로 사는 삶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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