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불갑산 호랑이. 1909. 2. 생포. 박제한 것을 불갑사에서 형상화함.

산신령 이야기, 소년 진섭의 삼밭재 기도 기연이 되다

집안의 우환으로 삼밭재 산신기도는 3년만에 끝나게 돼



삼밭재 기도는 햇수로 5년이나 실제기간은 3년간이다.
11살 늦가을부터 14살 겨울까지 다녔다.
산신기도가 실소득 없어 허망하다는 의미보다 어떤 상황에도 염념불망 변치않는 소년의 굳센 구도 의지와 그 기상에 포인트를 둬야 할 것이다.

진섭은 한번 하기로 한 일은 기어이 끝을 보고야마는 성미다. 열한 살 늦가을, 군서면 마읍리 선산에서 시제(時祭)를 지내기에 앞서 산신제(山神祭)를 지내는 것을 보고, 훈장이 모르는 도를 산신령이 해결해준다는 소식에, 그로부터 일구월심 산신령 뵙기가 소원이었다. 호랑이가 산신령으로 화한다는 -산신기도에 정성을 들이면 소원 성취된다는- 전래 설화에 혹한 것이다.

호랑이는 먹이를 찾아서 하루에 보통 80∼100㎞를 달린다. 보폭은 80㎝, 항상 뒷발이 앞발자국을 되밟는 습성이 있다. 뛰는 것이 매우 빨라서 한번의 도약이 4m에 달하며, 다른 야생동물을 쫓아갈 때에는 7∼8m 거리를 무난히 추월하며, 큰 바위나 높은 곳에서 아래로 도약할 때에는 10m까지도 뛰어내린다.

그 호랑이가 생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은 것은 처화(대종사 字; 결혼하면서 쓰기 시작함)가 당대 조선 최고 도사에게 번질나게 다닐 무렵인 열여덟 살(1909년 2월) 때였다. 불갑산의 한 농부가 파놓은 덫에 빠진 180kg 거구 호랑이는 논 50마지기에 상당하는 거금 200원에 일본인 하라구치 쇼지로에게 넘어갔다.


큰골 정자나무 샘에 산신기도

산신기도를 하려면 절에 가야 한다. 법당 뒤, 한 칸짜리 산신각(山神閣) 문을 열면 불단에 길게 자란 하얀 눈썹에 홍안의 백발도사와 호랑이가 어우러진 울긋불긋한 탱화가 모셔져 있다. 구수산에는 절이 없으므로 영험한 당산나무나 샘터에 기도하는 수밖에 없다. 진섭이 맨처음 산신기도를 드린 곳은 큰골 정자나무 샘터였다. 구호동 뒷산 작은 개울을 거슬러 개암골 깊숙이 들어가면 큰골 정자나무 샘터가 나온다. 웅장한 몸통을 드러내며 무수한 가지를 뻗고 버티고 선 노거수 느티나무는 진섭의 두 팔로 너댓 아름이 되고도 남았다. 새끼줄에 붉고 푸르고 누르고 검고 흰 헝겊 조각이 매달려 펄럭거렸다. 진섭이 단에 홍시를 놓고 절을 하고 꿇어앉아 종알종알 소원을 빌고 있는데 정집이 형이 나타났다.

"진섭이 너 여그서 뭐한다냐?"
형의 숯막이 근방에 있었다.

"성, 나 산신기도 혀."
의붓형 김정집은 어린 동생 진섭의 소원이 무엇인지 잘 안다. 한배에서 태어난 형제라 유독 정이 갔다. 태어날 때부터 10년 이상을 지켜봐 온 동생이 귀여워 자기가 못 다한 꿈까지 은근히 기대하는 바가 컸다.

"여그 답답 안허냐. 산신님 잘 나타나는 데 가서 정성을 들여야제."
"성, 어디 가면 쓰까?"
"쩌그 마당바위는 탁 트여 산신님 만나기 원훠니 낫제."
"개미 절터?"
"그려, 예전에 절이 있었으니 명당이고 영험할겨."

▲ 첫 번째 산신기도 터 구수산 큰골 정자나무 샘.

큰형 김정집이 삼밭재 안내해

숯을 구우며 큰골에서 살기 때문에 구수산 골짜기를 형만큼 잘 아는 사람이 없었다. 삼밭재 쪽을 향하여 가파른 골짜기 길을 타고 올라갔다. 개미절터 샘에서 오른쪽으로 어른 보폭 60보쯤에 앞이 탁 트인 널찍한 마당바위가 기도터로 안성맞춤이었다.

"되았다. 영판 산신령 기도로 딱 좋네."

진섭은 지난여름 큰물 질 때(신축년 물난리) 본 신령님을 꿈에도 잊은 적이 없었다. 해수가 범람하여 한밤중에 영촌이 침수되었다. 그때 뇌성벽력치고 번갯불이 번뜩거릴 때 언뜻 신령님을 뵌 적이 있었다.

산신기도 시작한 지 3년째 진섭이네 소가 쌍둥이 송아지를 낳았다. 산신기도 덕이라고 경사로 여겼는데, 호사다마랄까 진섭의 혼사가 정해지고 구호동 새집이 거의 마무리되던 때 송아지 한 마리가 호식을 당했다. 대사를 앞두고 이 무슨 변괴람, 박성삼은 진섭에게 산신기도 중지를 명하고 호식 당하고 남은 고기로 학자어른을 초청해 목수들과 술판을 벌였다. 문자삼이 껄껄 웃으며 말했다.

"새 사람이 들어온다더니! 처화 색시가 쌍둥이랬지. 어려서 죽고 처화의 짝이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가. 남은 송아지나 잘 키우게. 좋은 일이 있으려는 징조인 줄 알고"
결혼하면 새이름 자(字)를 쓰게 된다. 아명 진섭도, 자 처화도 학자어른이 지어줬다.

두 번째 훈장 김화천은 학자 어르신의 당부도 있었지만 일곱 살 아래인 진섭(15세)을 예사로 보지 않았다. 진섭을 대하는 태도가 각별했다.

그날 글방에 와서 진섭은 말 한 마디 없었다. 훈장이 진섭의 동무 고현태에게 물었다.
"진섭이 먼 일이 있었냐?"
"진섭이 아부이가 산신기도 고마 다니래요."
"우째 그란댜?"
"송아치를 호랑이가 먹었대유"

아버지가 홧김에 기도중지를 명해 중단하긴 하나 진섭은 허망하게 끝낼 수 없어 마지막 기도를 다녀오기로 했다. 어머니에게 작은 소리로 말했다.
"엄니, 내얄 마지막 기도 혀."

어머니는 초하룻날이면 어김없이 제물로 백설기를 쪄주었다. 마지막 기도 날에도 어머니는 노구솥에 작은 시루를 걸고 백설기를 쩌 삼베 보자기에 싸주었다.
▲ 시제 모시기에 앞서 산신각에서 산신제를 먼저 모시는 것을 본 진섭은 산신기도에 발심하게 된다.

기도 끝날 큰중10 돛드레미서 풍악잔치

김 훈장은 진섭이 삼밭재에 마지막 기도하러 갔단 말을 들었다. 내려올 때가 되었는데 두어 점이 지나도 하산하지 않았다. 무슨 변이 났나. 훈장은 자꾸 신경이 켰다. 그때 무슨 소리가 들렸다. 길게 끄는 유장한, 양반들의 기품 있는 풍악 같은 거였다. 훈장의 시야에 신이(神異)한 영상이 어렸다. 장대한 도인 풍의 사내가 앞장서고 그 뒤에 그의 제자인 듯한 아홉 명의 도꾼이 따랐다. 절도 있고 기품 있고 진중했다. 뒤이어 염불성에 곁들여 목탁이 규칙있게 울렸다. 열 명의 도인 뒤에 수수 만명의 신도들이 끝없이 줄을 이었다. 그 행렬이 개미절터에서 시작하여 큰골 정자나무를 거쳐 구호동을 지나 개울 건너 노루목을 넘어갔다. 개울 따라 산길을 강변나루까지 가더니 돛드레미 산기슭 갈메나무 가시덤불 속에서 풍장을 울리며 한 판 법석을 울렸다. 흥겨운 풍악소리에 강변나루 앞 갯벌의 황금물결이 넘실거렸다. 수수만년 하릴없던 갯벌이 풍작을 이룬 들판으로 변했다. 그리고 돛드레미 산기슭에 대궐 같은 집채가 들어서고 마당에 청년 남녀들의 경기하는 모습이 전개되었다. 참 신기한 일이로다, 김 훈장은 감탄했다. 분명히 진섭의 장래가 길할 조짐이었다.(김형오 구술자료; 김화천이 신비체험담을 은영천과 곽준석에게 이야기함)

진섭이 달라졌다. 산신기도는 중단하고 글공부에 주력하였다. 장가를 간다더니 정신을 차렸는가. 글공부 진도가 일취월장이었다. 〈통감〉을 보기 시작하면서 훈장이 가르치는 쪽쪽 줄줄 외었다. 춘삼월에 장가들고 〈통감〉 2권째 보면서 문리가 터졌다. 이제 제가 알아서 공부할 지경에 이르러 굳이 글방에 나올 이유가 없어졌다. 상투를 올린 뒤로 진섭은 부친을 따라 용암 문자삼 학자 어른댁에 드나들었다. 글 잘한다 문자삼은 길룡리 6걸 중의 우두머리였다. 문자삼은 박성삼의 멘토이다.
▲ 박청천 교무/교화훈련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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