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기교단 북방 교화의 효시

원불교사상연구원에서 개최한 '개벽의 시대를 연 원불교 여성 10대 제자' 조명은 여성선진들의 개척 교화 삶과 정신을 크게 알리는 계기가 됐다. 특히 이타원 장적조 선진은 둔산교당 이성심 교무의 발표를 통해 영남에서 만주, 목단강까지 거침없는 개척교화가 이뤄진 것으로 재조명돼 여성계 선진의 위상을 높였다.

그는 "북방교화는 1950년 한국전쟁 이전까지 북한과 만주 일대에 펼쳐진 원불교 교화상황을 이르는 말이다"며 "초기교단의 북방교화는 장적조에 의해 시작됐다"고 말했다. 부산지방 교화를 처음 개척했던 장적조 선진은 원기21년(1936) 해운업(유조선)을 하는 아들 박노신이 청진으로 이사를 가자 이를 기회로 북한지역에 최초로 진출해 청진지역의 인연들 7명을 입교시킨다. 원기22년(1937)에는 만주로 진출해 각지에 행상을 하며 용정·목단강시·장춘·심양 등 중국 동북지방에서 순교활동을 전개했다. 원기25년(1940) 12월에는 목단강시에 정착해 원기30년(1945) 5월까지 총 218명의 북방 교도들을 교화한다.

<원불교 제1대 유공인역사>1권 '전무출신편 장적조 항'의 출가후기에는 '선생은 만주로 가서 다년간 동지들을 구하며 교당 설립을 위해 노력한 결과 말 못할 파란곡절을 지낸 끝에 비로소 목단강에 교당 건물을 준비하여 놓고 비상시국으로 인하여 중지하고 총부로 귀환했다'는 기록이 남아있다. <원불교 입교원명부>에는 38선 이북의 북방교도가 총 844명으로 파악돼 있다. 북한에 만주지역(일제강점기 당시) 교도가 218명, 개성교당 교도는 1952년 8월 <원명부>에 등록된 입교자는 총 626명이다.

그는 "남자처럼 활달하고 방물장수를 했던 장적조 선진은 붙임성이 좋았다"며 "누구든지 만나기만 하면 손금을 봐준다고 하거나 사주를 봐준다고 하면서 그들의 한 맺힌 통사정을 다 들어줬다"고 말했다. 사회성과 친화력이 남달랐을 장적조 선진 특유 성격과 방물장수의 직업적 특성은 초창기 원불교 개척교화에 큰 역할을 할 수 있는 원동력이었다.

그는 또한 장적조 선진이 이렇게 큰 교화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이유로 '표적교화의 달인'이었음을 내세웠다. 그는 "장적조 선진은 주로 상업하는 사람과 지역의 유지, 도를 찾는 사람(도꾼) 등 경제력이 있어서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사람이나 가문을 교화 대상으로 삼고 끊임없이 공들여 교화를 성공시켰다"며 "북방교화에서도 많은 교화자가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이었다"고 설명했다. 장적조의 이러한 교화 역량으로 남부민교당 창립 유공인인 구양근, 임정술을 비롯해 초기교단의 큰 대들보 역할을 했던 서동풍, 서중안, 양원국 등 다수의 굵직한 인물들을 입교시킨다.

이렇게 교단 초기 개척교화의 효시였던 이타원 장적조 선진은 1878년 10월15일 경남 통영에서 부친 장문중 선생과 모친 박거창 여사의 6남5녀 중 차녀로 태어났다. 16세 박씨 가문으로 출가해 아들 형제를 낳고 생활했지만 선천적으로 남성적 성격인 탓에 한 가정에 얽매어 사는 것이 맞지 않아 항상 우울하게 지냈다. 그러던 중 33세에 전라도로 떠나 방물장수로 활동하며 예수교와 보천교 신앙 체험 등 다양한 종교 생활을 하다가 이만갑 선진 연원으로 불법연구회에 입문하게 된다.

그는 "장적조 선진이 교화바람을 일으키게 된 데에는 석두거사를 뵙고 생불이심을 의심치 않게 된 데서 연유한다"며 "그는 오는 세상에는 여자도 남자와 똑같이 큰 일을 할 수 있다는 석두거사의 법문에 방물장수로 활발히 돌아다니며 도덕바람을 불렸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과거 수천 년간 남성 중심으로 이어져온 역사 속에서도 남성에 못지않게 눈부신 활약을 해 온 여인들을 보통 여걸이라 칭하는데, 100년을 지내온 교단에서 수많은 여성 출가·재가 교역자가 배출되고 있지만 '여걸'이라는 칭호를 받은 제자는 단 세 분 뿐이다"며 "초기교단 남자 제자들의 백지혈인 역사 속에서도 그들 못지않게 눈부신 활약으로 교단사를 빛낸 걸출한 여제자들이 존재했다는 사실을 되짚어보는 것은 큰 의의가 있다. 현 시대 이후에도 여걸들이 배출되기를 염원해본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원불교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