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장오성 교무/송도교당
종교인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함정이 제대로 알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주장하는 '도그마'다. 자기 것만 옳다 여기며 여타의 것은 다 배제하려 든다. 한쪽만 편벽되게 고집하는 이는 다른 쪽에 사고의 기형이 형성된다. 오랫동안 사용하지 않으면 결국 그 부분은 사멸되는데, 사유체계도 마찬가지다. 그 부분의 사유는 사멸되어 아무리 합리적으로 설명해도 한발짝도 나아가지 못한다.

사고는 언어를 만들고 행동의 근거가 되므로 기형적 사유는 언어와 행동 역시 기형으로 만든다. 인류가 한 몸, 한 근원이니 평화롭게 어울려 살기를 염원한 성자의 뜻을 담는 것이 종교다. 성자들의 본의는 눈 어둔 제자들에 의해 완전히 뒤틀려, 종교의 도그마에 빠진 구성원들은 기꺼이 목숨을 거는 전쟁을 불사한다.

유교적 도그마에 빠져 불교적 사유체계가 사멸되면, 불교는 허무적멸(虛無寂滅)만 주장하여 임금도 부모도 없는 이상한 종교로 보인다. 불교쪽 도그마에 빠지면 유교는 너무 현실적인 도리만 밝힌 답답한 가르침으로 비판한다. 체만 밝히면 유교적 도리가 자잘하게 보이고, 용만 밝히면 불교적 도리가 허망하게 여겨진다. 둘 다 치우친 사유라 늘 다툼이 인다.

성자의 가르침은 온전하지만 성품을 밝게 알지 못해 일어나는 일들이다. 우리 본성은 공원정이 동시작용이지 허무적멸(空) 상태만이 아니다. 무부무군(無父無君)은 진공이요, 유부유군(有父有君)은 묘유다. 태극 무극이 허무적멸, 진공이라면, 묘유는 인간만사에 밝고 세밀히 적용되는 심신작용이다. 진공으로 체를 삼고 묘유로 용을 삼는 것이 부처의 참 가르침이다. 마음의 근본을 알아 육근동작에 그대로 활용하는 것이 유교적 참 예법이다. '예는 하늘 이치의 절문이요 사람 일의 의칙'이며, 차별법이 없는 자리에 극하여 다시 차별법을 쓰는 것이 예의 전체를 닦는 것이다. 유가에서는 무극 태극을 먼저 깨쳐 인의예지를 시의에 맞게 적용하는 안목이 필요하고, 불가에서는 허무적멸을 체로 삼고 보은불공을 용으로 삼아 병행해야 제불제성의 본의가 제대로 드러나게 된다.

깨치지 못하고 종교적 도그마에 빠지면 서로 다른 것만 찾느라 에너지를 낭비한다. 사유체계의 사멸을 자초하는 자기손해다. 성자들이 피안에서 어서 건너오라 손짓하는데 뗏목의 우열만 논하느라 눈감고 귀막은 채 다툼의 기술만 는다. 이겨봤자 도긴개긴이다.

삶의 등불이 되는 경전은 낭떠러지로 가는 것을 막아준다. 성자들이 깨달은 참나에 대해 기술한 것이 경전이다. 동일한 심인자리를 옮긴 것이니, 그 근본은 다 같다. 문화권마다 표현이, 뗏목이 조금씩 다른 것뿐이다. 깨치지 못한 제자들에 의해 뒤틀리고 왜곡된 부분들이 있어도 그 본의를 추구해보면 다 같다는 것을 아는 이는 다 안다. 어느 종교의 경전이든 제자들에 의해 뒤틀리고 꼬인 부분을 밝은 눈으로 풀어보면 다 일원(○)이 된다.

제자들에게 맡기면 그런 왜곡과 다툼이 일어남을 간파하고 열반을 앞둔 대종사가 그토록 밤을 지새워 만고불변의 정전을 손수 제정해 준 깊은 뜻을 오늘 다시, 또 다시 새겨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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