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법종 교무/휴무
역사는 원불교 문화 꽃피우는 바탕

선진의 삶 속 창립·교법정신 공감



단재 신채호는 "당신의 나라를 사랑하거든 역사를 읽게 할 것이다. 영토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 있어도 역사를 잃은 민족은 재생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역사는 살아있는 현재요 미래이다. 우리의 역사는 원불교 문화를 꽃피울 수 있는 바탕이 된다.

필자는 좌포성지 해설사 교육을 맡아 3년 동안 해설사들과 매월 몇 차례씩 모임을 가졌다. 공부하는 해설사 모임이 되도록 인근 교당을 비롯 성적지를 방문해 그곳에 담긴 역사를 깊게 공부하려고 노력했고, 선진 한 분 한 분을 모시고 그분들의 삶을 조명도 했다.

성적지와 선진들의 삶의 이야기는 얽힌 실타레가 풀려가듯 나오면서 대종사를 비롯한 선진들의 고귀한 삶 속에 창립정신과 교법정신을 공감하게 됐다. 바쁜 업무 가운데 자료를 모으고 정리해 해설사들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필자의 눈이 트이고 이야기 속에서 값진 보물을 얻는 기쁨이 참 많았다.

대종사와 선진들의 언어와 행동을 반조해 보고 역사의 흔적을 찾아다니면서 이 시대의 나는 어떤 꿈을 꾸고 살아가야하며 나의 역할이 무엇인가를 생각해 봤다. 역사를 통해 그 시대의 현장 속에 역사의 주인공과 나를 동일시함으로써 느껴보는 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필자는 역사를 통해 원불교의 근본정신을 습득했고, 교리에 대한 깊은 이해는 교도들을 더 깊은 신앙과 수행으로 이끄는 원동력이 됐다.

역사 자체가 문화의 바탕이 된다. 울산 배내청소년훈련원의 '구도하는 젊은 소년상'과 같이 역사의 귀감이 되는 장면들을 벽화나 조형물 등의 미술이나 문학으로 표현해 숨어있는 정신을 밝고 분명하게 표출시킬 수가 있다.

세력있는 사람이 불사를 하기도 하지만 민초들의 원력으로 값진 불사가 이뤄지기도 한다. 대산종사 외할머니 윤채운은 땅과 건물을 희사해 좌포교당이 설립되었고, 소실 김보현은 집과 땅의 희사로 닭메회관인 관촌교당이 창립됐다. 첩인 최내선은 중길리 교당을 창립해 후진들의 귀감이 됐다.

대산종사 증조부 형제는 대단한 재력가였다. 효성 또한 장해 임금의 허락으로 효자각을 마을에 세웠고, 남에게 혜시를 많이 베풀어 조부 김종진의 시혜비가 1곳에 현존하고 있다. 아쉬운 점은 1곳은 유실됐다는 것이다. 노덕송옥 등은 불심이 장하고 최도화는 이 집의 대소사를 도운 가운데 집안 인연을 원불교와 인연을 맺는다. 대산종사와 같은 큰 인물이 나오면서 집안에 50여명의 전무출신이 나오게 된 것이다. 대산종사 선조들의 쌓은 덕이라 할 것이다.

대산종사 탄생가가 진안군 향토문화유산으로 지정돼 앞으로 기념관이 세워진다면 중길리에서 30년 생활한 최도화, 초선터를 짓게하고 서울교당과 관촌교당의 창립요인인 이현공, 대종사의 지시로 만덕산 50정보를 사들인 이공주 등은 크게 드러날 것이다. 더불어 마령 출신 공산 송혜환은 보화당 운영으로 교단의 재력을 쌓았고, 많은 인재를 배출했다. 공산을 동지들이 재색명리가 끊어지고 정금미옥이라 평할 정도였으니 우리가 다시 공부할 바다.

대종사의 보좌역을 한 전음광과 그 가족으로 인한 교화 이야기 등 이 곳에 얽힌 많은 선진들의 역사를 기념하고, 소중한 삶들을 순례객들에게 안내한다면 우리의 역사는 더욱 풍요로워질 것이다.

필자는 학업시절에 창립의 많은 선진들을 가까이 모시고 살았기 때문에 대종사를 친견한 일화와 창립한 이야기를 실감나게 듣고 자랐다. 필자는 산 역사와 충만한 말씀들을 듣고 자랐지만 이제 후진들은 당시의 생생한 이야기를 역사로 공부할 수밖에 없다. 교사의 작은 실마리를 찾는 것도 큰 공부다. 주변 재가출가 교도들의 사례담을 발굴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 교화와 훈련자료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교사와 많은 인과이야기 가운데 유아 및 청소년들의 인성교육에 활용할 자료를 얻을 수있어서다.

종교는 문화에 의해서 이해될 수 있듯이 역사 속 이야기는 종교의 본질을 잘 설명한다. 후진들은 선진들의 치열한 구도의 삶 속에서 공부심(의두)과 공심을 읽고, 이를 교화 열정으로 끄집어 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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