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요양원에 살면서 몸이 굳어져 죽을 뻔 했을 때, '좌산 상사님과 인연이 깊어지게 된 계기가 되었다는게 감사하다'는 생각이 지금도 들곤 한다. 그런 일이 있은 후 좌산 상사님을 직접 모시게 된 것 같아서다.

원기79년 11월6일은 종법사 대사식이 거행됐다. 대산상사로부터 좌산 종법사가 임명되는 그 때 나는 '저 어른이 나를 살려주셨다. 저런 어른을 평생 모시고 다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한편 덕무로서 출가식도 얼마남지 않았을 때다. 공익부에서는 '예비덕무 13년동안 휴가 한번 못주었으니, 정토하고 신혼여행이라도 다녀오라'고 휴가를 내주었다. 여행을 다녀온 후, 8일 출가식을 했다. 그런 후 총무부에서 나를 찾는다는 방송이 들렸다. 총무부에서 가보니 조실에서 근무하라는 사령장을 주었다. 사령장을 받고 조실로 바로 갔다. 그때부터 좌산 종법사를 12년동안 모시게 됐다.

조실에서 종법사를 모실 때 가장 감동받았던 것은 어른을 모시던 모습이셨다. 내가 3년차 되었을 때 어느날 나를 찾으셨다. "자네 우리 차키가 몇 개씩 있어?" "3개씩 있습니다. 왜 그러세요?" 차 키를 달라고 하시니 아카디아 키를 드렸다. "무쏘 키도 줘. 대산 상사님 몸도 안좋으신데 다급하면 내가 타고 가야지." "제가 있잖아요." "자네에게 전화해서 가려면 30분은 걸리는데 급할 때 내가 후다닥 가야지." "그러면 아카디아면 되지 무쏘까지요?" "아카디아 시동 안걸리면 무쏘 타고 가야지." 나는 좌산 종법사님이 대산 상사님을 이렇게까지 생각하시는 줄 처음 알게 됐다.

매주 화요일만 되면 조실 앞 차를 대고 대기했다. 좌산 종법사는 매주 화요일마다 대산 상사님께 보고하러 다니셨다. 당시 상사원에 가면 우리도 들어오라며 대산 상사님께 인사드렸다. 좌산 종법사는 항상 무릎꿇고 앉으셨다. 대산 상사께서 3번 권하시면 그때야 반가부좌로 앉으셨다. 보고는 대체로 교단의 좋은 일만 보고 드렸고, 걱정하실만한 일은 말씀드리지 않으셨다. 대산상사님은 소음인이시라 방이 따뜻해야 한다. 당시에 초여름이어서 인사드린 우리들은 너무 더워 모두 뛰쳐나왔다. 그런데 좌산 종법사는 조금도 미동하지 않으시고 자세가 끝까지 흐트러지지 않았다. '스승 받드는 모습이 저런 것이구나'하고 감동을 받았다.

어느날 좌산 종법사님과 산행하는 중에 문득 이런 말씀을 하셨다. "내가 대산상사님 계시는 동안 내가 종법사라 생각하지 않았다. 대산 상사님 대신해 종법사 역할한다고 생각했다." 그 말씀을 듣고 좌산 종법사님의 스승님에 대한 마음이 얼마나 크신지 알게 됐다.

그 당시는 남자교무들 정복이 없었다. 보통 양복에 넥타이를 맸는데 교도들에게 항의가 많이 들어왔다. 종법사님은 당신에게 들어온 시봉금으로 2천만원을 모으셨다. 그리고 남자 정복 와이셔츠를 만들어 총회 때 직접 정복을 입고 나가셨다. 모두 환영하고 다들 좋아라 했다. 남자정복도 대산상사께서 추진하시려다 못하셨다. 그래서 그 뜻을 받들기 위해 당신이 직접 나서게 된 사실을 알았다. 그런 심법을 옆에서 지켜볼 때마다 '진짜 보통 어른이 아니구나'하면서 본받고 살려고 노력했다.

나는 좌산상사님을 12년동안 종법사님으로 모시기 전부터 남자요양원에서 이런저런 안좋은 모습을 많이 보여드렸다. 아침에 담배물고 청소하는 등 그런 꼴 다 봐주셨다. 되돌아보면 참으로 죄송하고 무례했다. 모시면서도 '나 같은 사람이 어떻게 이런 어른을 만나고 모실 수 있게 되었을까'하는 생각이 여러번 들었다. 몸소 행동으로 가르치고 깨우쳐 주시는 모습들이 한없이 존경스러웠다.

지금도 그 마음은 변함이 없다. 열반하실 때까지 한 목숨 바쳐서 모셔야겠다는 마음이다. 무엇보다 '스승님을 향한 존경과 모시는 마음'에 대해 먼저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시무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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