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정도상 작가/북일교당

오호, 사드라는 이름의 방어용 최첨단 전쟁무기라니… 최악의 야만은 가해자가 피해자인 척하는 위선에 있다. 미국과 일본이 바로 그러하다. 피해자 코스프레 놀이에 빠져 있는 가해자들은 모든 성찰을 거부해 버린다. 부끄러운 줄도 아예 모른다. 사드 배치는 트럼프가 아니라 오바마의 결정이었다.

인류적 차원에서 보면 오바마 역시 폭력의 힘을 신뢰하는 야만성의 지도자에 불과했다. 오바마는 재임시절에 한·일'위안부'협상을 강요하여 엉터리로 합의하게 만들었고 한·미·일 군사동맹을 완성했다. 우리가 조롱해마지 않는 트럼프가 저지른 짓이 아니다. 위선은 넘쳐나는데 원효는 보이지 않는다. 원효가 지금 여기에 있다면 어떠했을까? 꿈과 희망의 사탕발림이 가득한 문자질과 강연으로 떼돈을 버는 소위 힐링 강사들이며 힐링 판매원들일까, 아니면 권력의 사교계에 사정없이 똥침을 날리는 땡중이었을까?

그 유명인들이 힐링과 공감을 내세워 '아프니까 청춘이다' '잠시 멈춰라'는 등의 꿈희넘처니즘의 언어들을 쏟아내며 대중의 추앙을 받고 있는 동안에 세상은 빠르게 병들어 가기만 했다. 원효는 그런 세상을 개벽하고 싶어 했다. 나아가 자기 자신도 개벽하고자 했다.

여기에 원효의 위대한 불성(佛性)이 있다고 생각한다. 존재의 근원을 깨닫기 위한 치열한 용맹정진과 고행의 진정성이 전제되지 않은 타자(他者) 구원이나 '단정하고 맑고 깔끔하고 향기롭고 아름다운' 저 옳은 말씀의 종교적 발언들은 위선적이거나 기만적이다. 세계의 구조적 야만에 대해 핵심을 찌르고 들어가지 않으면서 섣부른 위로와 공감을 쏟아내는 종교 사교계의 말들은 공허하기 짝이 없다.

모든 존재와 세계는 서로 연기되어 있다. 서로가 서로에게 개벽된(열려 있는) 타자들의 무한한 그물망 위에서 일심(一心), '하나된 마음' 즉, 존재의 고향으로 가기 위하여 원효는 이종격투기의 링 위에서 격투했다. 고향을 떠나 타향을 떠돌게 되면 살기가 참으로 팍팍하다. 심지어 존재의 타향이라면 얼마나 숨이 컥컥 막힐까? 그러기에 존재의 고향으로 회귀하기 위한 원효의 고행과 마음공부는 민중들의 삶과 무관할 수가 없었다. 원효는 마음공부를 통해 깨우치면 민중의 삶에 조금이라도 보탬이 된다고 생각했다. 모든 것이 연기 즉, 그물코처럼 서로 얽혀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맑고 아름답고 원만한 위선의 언어를 버리고 마음의 본성으로 육박해 들어가는 그 어떤 힘들이 원불교에는 보이지 않는다.

인공지능 시대를 앞둔 인간의 깊은 절망은 물질의 노예가 되어 있으면서도 물질로부터 철저하게 소외되어 존재의 고향을 잃어버린 상실감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러한 상실감이 위선을 양산해내는 것이다. 원불교는 물질개벽을 철저하게 연마하여야 한다. 물질개벽에 대한 철저한 연마와 동시에 정신개벽을 위한 마음의 충돌들이 우후죽순으로 일어나야 한다. 그렇다. 존재의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음공부에 전념하는 원불교의 용맹정진을 보고 싶다. 옛 소태산은 죽었고 새 소태산은 아직 나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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